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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밭고랑»에 예수 그리스도 → 그리스도와의 일치 항이 있음.

당신에게는 잘 맞물리지 않는 두 부분, 즉 이성과 감정이 있습니다.

신앙의 지성은 길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영웅적으로 걸어가거나 어리석은 행보를 하거나 둘 사이의 큰 차이도 가르쳐줍니다.

특히 삼위일체의 하느님이 우리 손에 맡기신 사업의 신적인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그것과는 달리, 감정은 당신이 경멸하는 모든 것, 지금 경멸하는 것에조차 집착합니다. 무수한 작은 일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몸이 피곤해서인지 초자연적인 시각을 잃어서인지 당신의 의지가 약해졌다고 보자마자 그 작은 일들이 몰려와 당신의 상상을 끄집어내고, 끝내는 산이 되어 당신을 괴롭히고, 낙담하게 합니다. 일의 괴로움, 불순종, 수단의 부족, 꿈에서 보는 편안한 생활, 크고 작은 여러가지 꺼려야 할 유혹, 훌쩍거리는 감정의 욱신거림, 피로, 영적인 미지근함이 가져오는 괴로움 등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두려움, 즉 성인(聖人)이 되라고 하느님이 원하시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 데서 오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엄한 말투지만 용서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에게는 되돌아갈 ‘동기’가 털어 버릴 만큼 있지만, 하느님이 주시는 은혜에 보답하는 대담함이 부족합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 ‘그리스도 자신’이 되도록 부르셨는데 말입니다. 당신은 사도 성 바오로에 대한 예수님의 훈계를 잊은듯 보입니다.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이것은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당신이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기회를 잘 활용하지 않고 예수를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는 당신은 생각해야 합니다. 내게 길을 가르쳐 주었다, 이 진실로 섭리적이고 분명한 부름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라고 말입니다.

날마다 다음 말을 묵상하십시오. 사도는 항상 또 한사람의 그리스도, 그리스도 자신이어야 합니다.

제가 언제나 해왔듯이 그대에게 계속 허물없이 말하게 해 주십시오. 나 자신의 환난들에 관해서 이야기할 마음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내 앞에 고상(苦像예수의 시신이 달린 십자가) 하나를 마련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비록 언제나 명랑하게 당했기는 하지만, 제가 퍽 많이 환난을 당해왔다는 것을 덧붙여도 저는 개의하지 않습니다.

인내하는 것은 사랑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per lpsum et cum Ipso et in Ipso··· 진실로 우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 자신께서, 나와 함께,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내 안에.

그대의 친척들과 동료들과 친구들은 변화를 알아차렸고, 그것이 임시적인 일면이 아니고 그대가 더이상 당신 같지가 않음을 인식하였습니다.

근심하지 말고 계속하십시오. “내 안에 살아계시는 분은 이제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곧 지금 일어나고 있는 바의 사실입니다.

이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 늙은 하사관이나 혹은 한 젊은 위관이 훤칠하게 생긴 어느 신병이 그를 향해 오고 있는 것을 보는데, 그 신병은 그 장교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이나 더 나은 자질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경례와 답례는 여전히 행해집니다.

이와 대조되는 일을 묵상해 보십시오. 저 교회의 감실로부터, 그대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대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그대에게 주시는, 완전한 하느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대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그대는 주님께 아무런 주의도 하지 않고 지나갑니다.

당신은 자신을 중심에 두고 겉돌고 있습니다. 그러고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사람들이 몹시 분주하게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 그리스도의 이름만은 설교되고 있지만,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이 드문 현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로서 예수님과 일치하여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야할 그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가서 여러 나라 백성 모두에게, 모든 시대에 걸쳐 가르침을 전파하라고 주님께서 분부하셨는데 말입니다.

그대가 의외로 발견한 우애와 우정의 정신이 그대에게 열성과 함께 채워졌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갈망하면서 꿈꾸어 왔었지만 경험해 본적이 없었던 그 무엇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우리들 모든 개개인을 위해 남김없이 우리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준 그 사랑스러운 우리들의 형제인. 그리스도의 형제들임을 사람들이 잊었기 때문입니다.

뜻밖에 발견한 우애와 우정의 정신에 당신은 푹 빠졌습니다. 당연한 얘기입니다, 꿈에 그리면서도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당신이 그것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형제라는 것, 즉 타인을 위해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우리의 다정한 형제, 그리스도의 형제임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다음과 같은 극히 비그리스도교적인 비평을 들었을 때 매우 슬퍼했습니다. “네 원수들을 용서하라: 그대는 그것이 얼마나 그들을 성나게 하는지 상상도 못합니다!”

그대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조용히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제 이웃을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 사랑을 값싸게 만들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제가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하고, 저는 주님을 본받기에 굶주리고 있습니다.”

정직한 영혼이 현세의 잔인한 불의에 직면한다면, 그 영혼이 자기의 영원하신 하느님의 영원한 정의를 기억 할 때 얼마나 기뻐뛰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그 영혼은 생산적인 열망으로 저 바오로의 감탄을 발합니다: “더이상 살아있는 것은 제가 아니고” 내 안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실 것입니다.

보속은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이 주님을 바싹 따라가야 한다면 우리들에게는 보속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각 영혼 안에서의 —그대의 영혼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役事)입니다. 주님께서 그대의 육체를 십자가 상의 예수님의 그것같이 만드실 때까지, 얌전하게 굴고 하느님께 장애물들을 내놓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