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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초자연적인 생활 → 개인 거룩함 항이 있음.

그리스도인들의 위험한 안전(安全)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보호 속에 사는 이, 전능하신 분의 그늘에 머무는 이” (시편 91,1).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위험한 안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얘기를 경청하신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신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렇게 확신한다면 우리는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함께 나누려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께 다가간다면, 그것은 우리가 새로운 회개를 준비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정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감에 보다 주의 깊게 귀 기울이며,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영감이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하느님께서 불러일으키시는 거룩한 갈망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첫 번째 결정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참으로 따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결정한 이후,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이행해가는 여정에서 우리가 많이 성장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할 일이 여전히 많다는 게 사실이지 않습니까? 특히 우리 안에 여전히 너무도 많은 교만(驕慢)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실제로 다시 변화해야만 합니다. 더욱 성실하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은 줄어들고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커지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요한 3,30)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성인이 얘기한 새로운 목표를 향해 쉼 없이 전진해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20) 이것은 고귀하고 숭고한 바람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뜻하며 이것이 바로 거룩함인 것입니다. 만약 세례 때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 심어주신 거룩한 삶을 우리가 그대로 살고 싶다면,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우리는 거룩함을 키워가야 합니다. 이 거룩함을 꺼리고 피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삶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거부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불길은 계속 지펴져야 합니다. 그 사랑의 불길은 우리 영혼의 힘을 모아 매일 커져야 합니다. 불길은 무언가를 계속 태움으로써 유지됩니다. 만약 우리가 계속 불을 지피지 않는다면 꺼져버릴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얘기를 기억합시다. “만약 여러분이 스스로 ‘이만큼 왔으면 충분하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길을 잃은 것입니다. 더 멀리 나아가십시오. 계속 가십시오. 같은 장소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되돌아가지 마십시오. 길 밖으로 벗어나지 마십시오.”

사순시기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따르며 성장하고 있는가?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 성장하고 있는가? 일상에서 실천하는 너그러운 사도직 활동이 성장하고 있는가? 내 동료들과 함께하는 일상의 일에서 성장하고 있는가?

우리 모두 조용히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한번 변화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고, 우리 행동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분명히 비추어지려면, 우리가 변화해야만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2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 말씀을 다시 하고 계십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고 우리 귀에 속삭이시면서 말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박해 시기, 또는 순교의 기회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예전의 우리’를 부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지금의 우리’를 고백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행하고 생각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의 고백이 이뤄지도록 합시다.”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화답합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에페 5, 8-10)

회개는 한순간의 일이고 거룩해지는 것(聖化)은 평생의 과업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에 심어주신 사랑의 거룩한 씨앗은 자라나기를 원하고 행동으로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대로 한결같이 일치하는 열매를 맺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상황에서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처음 회개했던 순간의 그 빛과 강렬한 느낌을 되찾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며 양심의 깊은 성찰을 갖추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주님과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다시 회개하고자 한다면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으로 부르십니다 

우리는 갈바리아산의 그 드라마를 다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감히 설명하건대, 예수님께서 죽으신 갈바리아산의 그 드라마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거행된 최초의 미사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죽음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예수님은 당신에게 사형선고로 내려진 십자가를 껴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희생은 당신 아버지에 의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희생의 결과로 성령께서 인류에게 강림하신 것입니다.

수난의 비극은 우리의 삶과 전체 인류의 역사에 성취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성주간이 단순한 기념시기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성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우리 영혼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하는 그 무엇인가로 여기고 묵상하는 시기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제2의 그리스도이자, 그리스도 자신(alter Christus, ipse Christus)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 모두는 우리 삶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1베드 2,5) 사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순명을 드러낼 수 있으며, 따라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사명을 우리가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곧바로 우리 자신의 비참함과 개인적인 타락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 때문에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비관주의자가 되어선 안 되며, 우리의 이상을 버려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처한 현재의 상황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당신의 삶을 더불어 나눔으로써 우리 삶이 거룩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곧잘 ‘거룩함’이란 헛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거룩함이란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것이고, 왠지 수덕신학(修德神學)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거룩함은 실질적인 목표도, 살아있는 실재(實在)도 아닙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서로를 설명할 때 “성도(聖徒)”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모든 성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로마 16,15)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사는 모든 성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필리 4,21)

지금 갈바리아산을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지만 그분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나타내는 표식은 아직 없습니다. 성금요일은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살기를 원하는지, 진정 거룩하게 되길 원하는지 성찰하기에 좋은 시기입니다. 그리고 신앙을 행동에 옮김으로써 우리의 연약함에 맞설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으며 우리가 매일 하는 일에 사랑을 쏟겠다고 결심할 수 있습니다. 죄의 체험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성장해야 합니다. 또한 더욱 충실해지고 진정으로 우리 주님과 하나가 되겠다고 더 깊이 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주님의 사도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주신 사제로서의 사명을 꾸준히 수행해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주신 사제의 사명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도록 격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원천이신 예수님 

저는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몇 가지 특징을 여러분과 함께 간단히 되새기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히브 13,8)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살아 계신다는 사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모든 생활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역사의 과정들을 짚어보면 발전과 진보를 깨닫게 됩니다. 과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힘을 더욱 잘 알게 해주었습니다. 오늘날의 기술은 과거보다 훨씬 더 세상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기술은 문화와 화합, 그리고 물질적 복지의 측면에서 인간이 꿈꿔온 것보다 더욱 위대한 수준에 이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여전히 불의와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때로는 그 정도가 과거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점을 들어 이러한 낙관론에 반기를 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옳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런 생각들을 넘어서 무엇보다 저는 이렇게 기억하고 싶습니다. 종교적 범주에서 보면,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며 하느님은 여전히 하느님이시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진보는 이미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 정점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십니다.” (레위 21,6)

영적 생활에 있어서 더 이상 새로운 시대는 없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항상 살아 계시고 우리와 함께 머무르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을 통해 그분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삶이 우리의 삶 안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Ipse Christus)으로 보일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삶에서 그분의 삶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신앙을 가져야 하고, 또한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인간적 계산에 의해서도 결코 멈춰선 안 됩니다.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이겨내기 위해 주님이 주신 과업에 우리 스스로를 투신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노력이 새로운 길을 열어갈 것입니다. 하느님께 헌신하는 우리들 각자의 거룩함이야말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단 하나의 해결책입니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려운 일이라고 여러분은 얘기할 겁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이상적인 것은 항상 수준이 높은 법이니까요. 하지만 딱히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플 때 딱 들어맞는 약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일의 경우엔 그렇지 않습니다. 특효약이 항상 있는 법입니다. 그 특효약은 바로 거룩한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당신이 제정하신 다른 성사들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말과 행동으로 다시 말해봅시다. “주님,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만나는 당신의 섭리와 매일 주시는 당신의 도움이 제가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엄청난 기적을 일으켜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키워달라고 부탁해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을 밝혀주시고 우리의 의지를 굳세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무르십니다. 바로 그분께서 항상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강론을 시작한 이후로 항상 신자들께 주의를 드린 것이 있습니다. 거룩함에 대한 잘못된 느낌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실제로 알게 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맞습니다. 여러분은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이나 저나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거룩하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영원무궁하신 분의 거룩한 부르심으로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에페 1,4) 우리는 특별히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들 개개인의 엄청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느님의 도구들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나약함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쓰임새가 큰 주님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닥쳐오는 유혹들은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알게 해주는 척도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생생하게 체험했기 때문에 낙담한다면, 그 순간이야말로 온전히, 그리고 순명하며 하느님 손길에 스스로를 내어드릴 때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을 만나 자선을 청했던 어떤 걸인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걸인 앞에 멈춰 서서 그에게 다섯 도시의 지배권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걸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뒷걸음질 쳤습니다. 그리고 소릴 질렀죠. “저는 그렇게 어마어마한 것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대왕이 대답했습니다. “너는 꼭 너답게 내게 청했고, 나는 꼭 나답게 네게 주는 것이다.”

우리들 자신의 한계를 명확하게 깨닫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당신의 생명을 우리가 더불어 나눌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뒤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 편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실하고, 또한 충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직시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이해하고 우리들 자신의 잘못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사랑과 자극을 예수님 안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여러분과 나 그리고 우리 모두가 느끼는 좌절감마저도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는 하나의 기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허약함을 인정합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권능에 고백합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희망과 기쁨,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도구로 쓰길 원하신다는 강한 확신으로 일관돼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교회의 한 부분으로 여긴다면, 그리고 베드로라는 반석과 성령의 활동으로 우리 자신을 지탱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살아가는 모든 순간의 작은 의무들을 완수하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조금씩 씨를 뿌리면 우리의 곡식 창고는 넘쳐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