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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사랑의 담금질»에 겸손 →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자기 인식 항이 있음.

무엇을 그토록 자랑스러워합니까? 우리의 모든 활동은 그분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에 합당하게 처신하십시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 그리고 어머니께 그대가 지은 그 모든 잘못과 엄청난 허물을 깨닫고 통회의 눈물을 흘리게 해달라고 청하십시오. 그것들을 절대로 잊지 않고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예수님, 정화의 불이 될 사랑을 주십시오. 그 불이 저의 가련한 육체, 가련한 마음, 가련한 영혼, 가련한 몸을 살라 지상의 모든 비참함에서 깨끗해지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비워낸 저를 당신으로 채워주십시오. 이 땅의 그 어떤 것에도 절대로 집착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사랑이 언제나 저를 지탱하게 해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겸손하신지요. 대조적으로 참으로 부끄럽게도, 나는 두엄 가루에 불과하면서도 너무나 자주 나의 교만을 존엄 또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나의 교만을 위장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스승을 따를 수많은 기회를 놓치거나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그 기회들을 초자연적으로 만들지 못한 것입니다.

그대는 누구에게도 결코 무자비하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을 두고 그대의 자비를 입기에 합당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그대 역시 자비를 입기에 합당치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대는 세상에 태어나기에 합당치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기에 합당치 않으며 하느님의 아들이 되기에 합당치 않고 가족을 두기에 합당치 않으며….

우리의 좋은 벗인 그 사제는 서명할 때 “죄인”이라고 쓰곤 했는데, 그것이 사실임을 확신했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저의 하느님, 저도 정화해 주십시오!

그대는 자신을 주인이 옷을 벗겨 버린 가련한 사람이라고 여기는군요. 그대는 죄인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그대는 우리의 첫 조상이 알몸임을 부끄러워하던 것을 이해하는군요.

그대는 늘 울어야 합니다. 사실 그대는 울었고 큰 시련도 겪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아주 행복합니다. 다른 누구와도 자리를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 해 동안 그대는 평화와 기쁨을 상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는 이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 행복의 비밀을 들여다보게 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대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는 괘념치 않겠지만, 나는 왜 사람들이 종종 그대를 두고 ‘평화의 사람’이라고 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베껴 쓰고 있는 글을 쓴 사람은 그대였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은 아십니다! 예수님, 당신의 사랑하시는 케파가 한 이 말을 제가 쓰라리면서도 감미로운 호칭기도로 얼마나 자주 되풀이하는지요.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저는 알지만, 저 자신에 대해서 정말로 자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당신께 사랑한다는 말씀을 분명하게 드릴 수가 없군요. 불성실하고 배은망덕한 제 삶에는 당신을 모른다고 부정하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 주님은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예수님, 제가 하는 행동들이 제 마음속 이 열망을 절대로 거스르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 기도를 그대의 기도로 삼아 계속 바치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는 틀림없이 그대의 기도를 들으실 것입니다.

겸손은 하느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데서 생겨납니다.

그대는 자신이 덕도 재능도 능력도…몹시 부족하다고 여깁니다. 그대는 눈먼 바르티매오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고 싶지 않나요?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대가 수없이 말씀드리는 얼마나 아름다운 열망입니까!

그분은 그대의 말을 들으시고 도와주러 오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대의 일을 두고 박수갈채를 보낼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나아가, 때로는, 그대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는 다른 사람들이나 기관들이 그대를 이해해 주리라고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추구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그렇지만 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하더라도 근심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불쌍한 사람이 갑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대는 이 지상에서 오로지 그대의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을, 모든 것에서 그분의 영광만을 염려합니다.

캔버스 화폭 앞에서 저 예술가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고 싶은 깊은 갈망으로 외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주님, 당신을 위해 그리고 싶습니다. 서른여덟 개의 심장을,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서른여덟 명의 천사를, 당신의 천상 하늘을 장식하는 서른여덟 개의 기적을, 당신 망토에 서른여덟 개의 태양을, 서른여덟 개의 불꽃을, 서른여덟 개의 사랑을, 서른여덟 개의 광기를, 서른여덟 개의 기쁨을….”

그런 다음에 이 화가는 겸손하게 인정했습니다. 그것은 상상이며 바람일 따름이라고요. 실제로 그가 그리는 것은 눈을 기쁘게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괴롭게 하는 미완성의 그림 서른여덟 편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일할 때 ‘우월감’을 지녀야 한다고 나는 그대에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월감은 교만의 표시가 아닌가요? 그대가 내게 물었지요. 아닙니다. 그것은 겸손의 결과입니다. 저를 이렇게 말하도록 하는 겸손입니다. 주님, 당신은 계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닐 따름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완전함을 지니십니다. 능력, 힘, 사랑, 영광, 지혜, 권위, 존엄…. 아빠의 강한 품에 안기는, 또 사랑하는 엄마의 무릎에 앉는 아기처럼 제가 주님과 결합한다면, 저는 당신 신성의 따뜻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당신 지혜의 빛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의 핏줄을 통하여 흐르는 당신의 힘을 감지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그대의 이마를 땅에 박고는 그대가 빗자루로 쓸어 담은 쓰레기보다 얼마나 더 지저분하고 천한지를 (사실이 그러니까) 생각하십시오.

이런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대를 선택하셨습니다.

신부님, 신부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지요. “저는 많은 오류를 범했습니다. 너무 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압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아시고 고려하시는 주 하느님께서는 다만 그대가 겸손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아 날마다 당신을 더욱 잘 섬기도록 분투하기를 바라실 따름입니다. 더욱 내적인 삶을 통해서, 끊임없는 기도와 신심 행위를 통해서 또 그대의 일을 성화하는 데 적합한 수단을 활용함으로써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크고 작은 모든 노력을 아버지이신 하느님, 아들이신 하느님, 성령이신 하느님을 위해 봉헌할 것입니다.

명민한 대학생 네 명이 기쁘게 학생 기숙사의 가구를 옮기면서 한 일을 떠올리면 감동적입니다. 두 명은 공학도였고, 두 명은 건축학도였는데, 교실에 칠판을 옮긴 후에 “모든 것은 하느님을 영광을 위하여!”라고 쓴 것입니다.

예수님, 저는 예수님께서 크게 기뻐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길 원합니다. 하느님의 모든 영광을 위하여!

이것이 그리스도의 무기로 무장하여 전투를 치르고 승리하려는 이상(理想)입니다. 이 이상은 오직 기도와 희생, 믿음과 사랑을 통해서 실현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하십시오. 신뢰하십시오. 고난을 겪으십시오. 그리고 사랑하십시오!

그대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대가 반드시 맞게 될 직업적인 성공이나 실패 때문에 노동의 참다운 목적을 잠깐이라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노동의 참다운 목적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해서나 우리 영예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예와 영광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삽니다. 이것이 우리를 움직이는 동인이어야 합니다!

올바른 지향은 “오로지, 그리고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칭찬받으려고 하지 말고, 또 마땅히 칭찬받을 만하다고 해도 칭찬받으려 하지 말 것을 그대에게 권고합니다. 드러내지 않고 지나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또 우리의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행동이나 생활도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작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요!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

저는 진흙에서 생겼으며 땅은 제 모든 혈통의 유산입니다.

하느님 아니시라면 마땅히 찬미 받으실 분이 누구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