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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사랑의 담금질»에 십자가 → 십자가에 대한 사랑 항이 있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마십시오. 그대 자신을 위해서는 오직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만 바라십시오.

비록 인간의 눈에 나쁘게 비치더라도 그것이 그분의 손으로부터,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대에게 좋게, 그렇습니다, 아주 좋게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날로 더욱 확신하며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환난 중에 저는 기뻐하였나이다…, 주님의 잔이 얼마나 감미로운지. 제 전 존재를 흠뻑 취하게 하시나이다!”

예수님, 저를 도와줄 키레네 사람 시몬 없이 십자가를 지게 해주십시오. 아닙니다. 잘못됐습니다. 저는 당신 은총이 필요합니다.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이 일에 당신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분명 저를 위한 키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저의 하느님, 당신과 함께라면 어떤 시련도 저를 주춤거리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의 십자가가 권태나 슬픔이라면요? 그 경우라면 주님, 제가 당신께 아룁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저는 기꺼이 슬퍼할 것입니다.

제가 당신만 잃지 않는다면, 어떠한 슬픔도 전혀 슬픔이 아닐 것입니다.

철부지 아이는 자기 손가락에 박힌 가시를 꺼내기 위해 엄마가 바늘을 찔러 넣을 때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불고 법석을 떨지만 사리 분별이 있는 아이는 아마도 연약한 육신으로 인해 눈물을 글썽이겠지만 좋은 엄마를 고맙게 여기며 바라봅니다. 엄마는 아들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상처가 더 심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니까요.

예수님, 제가 사리 분별이 있는 아이처럼 되게 해주십시오.

돌이나 나무를 조각할 때처럼, 우리는 날마다 회개의 정신으로, 또 작은 고행들로써 우리 삶의 모난 부분들을 조금씩 더 다듬고 결점들을 없애야 합니다. 고행에는 능동적인 고행과 수동적인 고행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능동적 고행은 작은 꽃들을 모으듯이 하루 동안 자발적으로 찾아서 하는 고행입니다. 수동적 고행은 외부에서 오는 것인데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지만 부족한 것은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그대가 그대의 전부를 너그러이 그리고 기쁘게 내놓는다면, 그대는 얼마나 놀랍게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분과 함께 묵상하고 살아가십시오. 자주, 날마다, 그분이 채찍질을 당하실 때 그대의 어깨를 내미십시오. 가시관을 씌우도록 그대의 머리를 내미십시오.

제 고향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랑에는 사랑으로 갚는다.”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면 잠잘 때조차도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대에게 하느님과의 일치가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그대는 하느님의 뜻과 겨루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대가 잘 알고 있듯이, 그것이 그대의 나약함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아주 많은 것이 그대에게는 없다는 그 사실을 사랑하십시오. 그대가 그대의 길을 출발하면서 또는 계속 가면서 만나는 장애물들을 사랑하십시오. 그대가 아주 보잘것없고 영적으로 비참하다는 것을 사랑하십시오.

그대가 가진 모든 것과 그대의 사람들에게 속하는 모든 것을 실제로 봉헌하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봉헌하십시오. 인간적으로 보면 꽤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초자연적 빛으로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힘겹더라도 또 힘겹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모순이 아님을 그대는 충분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자신을 내어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많은 영혼이 드러나지 않은 내적 삶에서 자신을 내어놓습니다. 주님만이 빛나시도록 하려고 말입니다.

나는 그대와 내가 성가정 축일에 하느님께 아주 가까이 가기를 원했던 그 사람처럼 행동하기를 원합니다. 당시에 성가정 축일은 주님 공현 팔일 축제 중에 지냈습니다.

“제게는 작은 십자가가 많이 있었습니다. 어제는 그 가운데 하나가 저를 너무 아프게 해서 저는 울었습니다. 오늘 그 십자가로 저는 아버지 성 요셉과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서 당신들의 이 자식이 성탄 선물 없이 지내도록 하지 않으시라는 것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 선물은 제가 예수님께 배은망덕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 빛이었습니다. 저를 당신의 도구로 쓰시길 원하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을 저의 돼먹지 못한 처신으로 거스르려 했던 엄청난 잘못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쉽게 쉽게 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아야 하며, 그럴 수도 없습니다. 지상에는 반드시 고통과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십자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십자가 없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뿐 아니라 그들은 자기 십자가를 피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심각하고 무거울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평화로 가득 차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키레네 사람 시몬이 되시어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신뢰하며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이것이 어떤 십자가입니까? 십자가 없는 십자가네요. 이제는 당신께 저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는 그 법칙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당신의 도우심으로, 저의 모든 십자가는 늘 이럴 것입니다.”

우리의 저 친구가 오래전에 한 이 결심을 그대 자신의 영혼 안에서 새롭게 하십시오. “주님, 저는 구경거리가 아닌 고통을 원합니다.”

십자가가 있다는 것은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을 모시는 것이니!

십자가, 거룩한 십자가는 무겁습니다.

우선, 저의 죄가 있습니다. 또 어머니인 교회가 겪는 여러 고난의 슬픈 현실이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가톨릭 신자가 냉담합니다. 그들은 실제로는 십자가를 원치 않으면서도 원하는 척하니까요.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갈라져 있습니다. 우리가 또는 다른 사람들이 겪는 질병과 시련이 있습니다.

십자가, 거룩한 십자가! 무겁습니다. 지극히 의롭고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 뜻이 이루어져 모든 것 위에 영원히 찬미와 찬양받으소서! 아멘. 아멘.

그대가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곳을 걸을 때, 자신을 단지 십자가에 내맡기지 않고 온 마음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 그대가 하느님의 뜻을 사랑할 때, 그대가 십자가를 사랑할 때, 그때, 오직 그때만이 그분께서 십자가를 지십니다.

관대하게 ‘이루어지소서!’ 하고 응답하면서 그대의 고통―그것이 외적인 십자가이든 내면의 십자가이든 간에―을 하느님의 뜻에 합치시키십시오. 그러면 그대에게 기쁨과 평화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한 사제는 시련이 닥쳤을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당신께서 주시고자 하는 그 십자가를 제게 주십시오. 이제 저는 그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제 사제직의 풍요로운 축복으로 찬미합니다.”

강한 타격을 받을 때, 어떤 십자가가 주어질 때, 그대는 우울해하지 마십시오. 반대로 행복한 얼굴로 주님께 감사드리십시오.

주님, 저는 주저하지 않고 수없이 거듭해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께서 치욕스럽고 참혹하게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저는 당신을 따라 당신과 함께 고통을 겪고 싶습니다.

오, 예수님! 사랑의 광기로 타오르는 모닥불이 되고 싶습니다. 저의 현존이 꺼지지 않는 불이 되어 주변 수 킬로미터를 충분히 밝히기를 원합니다. 제가 당신의 소유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런 다음에 십자가를 맞이하게 하소서.

고난을 겪기, 사랑하기, 믿기. 이는 놀라운 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도록 초대합니다. 우리 어깨로 전 인류의 무게를 느끼도록, 또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른 계획, 명확하면서도 사랑에 찬 그 계획을 우리 각자가 처한 상황과 하는 일에 맞춰서 이행하도록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