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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고랑»에는 내적 생활를 주제로 하는 24 항이 있음.

옆에서 조르면 조를수록 더 많은 것을 얻는 것이니까. (역주: 서양속담) 그러니까 좀 더 가까이 다가서세요. 성인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내적생활을 의상에, 복음서에서 말하는 결혼 예복에 견주기를 좋아합니다. 함께 천에다 힘을 주는, 실같은 온갖 경건한 습관과 행동으로 천은 짜입니다. 그러므로 찢어진 옷은 비록 나머지 재료가 좋은 상태로 있다 하더라도 거절당하는 것과 꼭같이, 만약에 그대가 기도하고 일하지만 회개하지 않는다면(또는 다른 길로 돈다면) 그대의 내적생활은 (말하자면) 완전하지가 않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유일하게 가능한 길은 진지하게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임을 언제 인식할 것입니까?

화내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진지하게 받들기로 결심하십시오. 그대의 그 경박함은 만약에 그대가 그것과 싸우지 않는다면, 슬프고 모독적인 웃음거리가 되는 것으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대는 가끔 당신 성격의 나쁜 쪽이 나오게 내버려 두고, 그것이 한가지 경우 이상으로 터무니없이 거칠게 그 자체를 나타냅니다. 그밖의 경우에는 그대의 마음과 그대의 머리를 지극히 거룩한 성삼위를 위한 훌륭한 거처가 되도록 준비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그 결과, 언제나 당신은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버립니다. 예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계속 이렇게 하면 그대는 결코 내적생활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하느님이시고 완전한 인간이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경탄하고 주로 따라다니지만 그 인성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겉모습은 진실로 믿음이 깊어 보이지만 초자연의 덕을 실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연덕을 몸에 익히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에든지 다 듣는 약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거룩함(聖性)입니다. 그러니 성인들은 평화, 강의, 기쁨, 확신 등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머지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감추어진 내적생활의 경이로움.

그대는 그들 앞에다 엄청나게 경이로운 새 세계를 놓아 주고 있는 중입니다.

그대는 얼마나 많은 새로운 일들을 발견했는지요! 그런데 여전히 가끔 차라리 순진해서 그대가 이미 모든 것을 보았고 모든 것을 이미 발견해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유일하고 측량할 수 없는 주님의 보물에 도달해서 그것에 손댈 수 있게 될 것이고, 주님께서는 만약에 그대가 사랑과 민감함으로 호응한다면, 늘 “새 일들”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단지 시작에 불과함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함은 자신을 하느님과, 무한하시고 다함이 없으신 우리들의 하느님과 동일시하는 데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들”을 이해하기에 이르는 것은 공부라기보다는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대는 一애정을 가지고一 일해야 하고, 공부해야 하고, 질병을 받아들여야 하고, 맑은 정신으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대의 나날의 성찰을 위한 요점이 있습니다. 저는 저의 아버지 하느님과 이야기함 없이 한시간을 지나가게 내버려 두었는가? 저는 주님께 자녀다운 사랑을 가지고 말씀드렸는가? 그대는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속이지 않도록 합시다.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하기만 하고 나머지는 방치해 두는 그림자 같은 존재도 아니며,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주인 같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의 존재는 비록 오감으로 감지할 수 없지만 손으로 만져보고 목격할 수 있는 그 어떤 현실보다 더 확실합니다.하느님은 지금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살고 현존하고 계십니다. 우리를보고,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고, 우리를 인솔하며, 우리의 가장 작은 행실과 마음 속 마음을 보고계십니다.

그렇게 저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삽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한마디도 걸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 감정을 억제하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느님에게 사랑을 표시하지 않고 보답을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죽은 신앙’으로 계속 살아 있어도 되겠습니까?

만약에 그대가 하느님과 함께 있다면 그대는 분명히 “구제불능”한 많은 일들을 구제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노상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저들 축복받은 영혼들은 그들이 예수님에 관해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을 듣고, 주님을 즉각적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인식할 때 행복합니다.

우리가 그 행복을 누리지 않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주님을 따르려는 결심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임을 그대는 잘 압니다.

다시 한번 그대는 그리스도께서 대단히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대는 모든 일을 주님을 위해서 해야한다는 것을 인식하였습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오십시오. 더 가까이! 주님께서 그대가 신뢰할 수 있는 그대의 친구로, 그대의 안내자가 되실 때까지요.

그대가 저에게 말하기를 매일 그대는 하느님 안에 더 뿌리 박게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매일 그대는 그대의 형제들과 더 가까워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즉 주로 만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을 알기 위해 크게 눈을 뜨고 인생을 달려나가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턴 맑은 눈으로 달리십시오. 진정으로 당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을 주님과 함께 보기 위함입니다.

만일 내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면, 혈액이 자연스럽게 상처를 향해 흘러가듯이 사소한 어려움에도 곧 하느님에게 도움을 청할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몸이니라···”, 빵의 형상 속에 감추어진 예수님의 산 제사가 행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주님의 살을 가지고 그리고 주님의 피를 가지고, 주님의 영혼을 가지고 그리고 주님의 신성을 가지고 거기에 계십니다. 주님은 토마스가 주님의 영광스러운 상처 안에다 자기 손가락들을 놓았던 그 날의 주님과 같으십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퍽 많은 경우에, 그대는 주님을 만났을 때 그대가 아는 어느 사람에게라도 보여 줄 만한 단순히 좋은 예절에서 나오는 가벼운 인사표시도 보여드리지 않은 채 어슬렁거리고 지나갑니다.

그대는 토마스보다 훨씬 덜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대에게 자유를 얻어 주기 위해, 그대의 절친한 친구가 교도소로 갔다면, 그대는 그를 찾아가고, 한참 동안 그에게 이야기하고, 그에게 어떤 선물을 가져가고, 그를 위로해 주고, 그에게 당신 우정의 따사로움을 보여 주려고 시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그 재소자와의 대화가 그대를 어떤 죄악에서 구해 주고 그대에게 선익을 준다면, 그대는 그 대화없이 해나가겠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한 친구 대신 그것이 그대의 아버지거나 또는 그대의 형제라면, 그 때에는 어떻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우리들 곁에 머물러 계시고, 우리들을 떠받쳐 주시고, 우리들을 인도해 주시기 위해 우리들을 위한 성체로 남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서만 갚아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매일 몇 분 동안이라도 주님께 우리들의 인사와 우리들의 자녀로서와 형제로서의 사랑을 가져다 드리기 위해 성체로 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 늙은 하사관이나 혹은 한 젊은 위관이 훤칠하게 생긴 어느 신병이 그를 향해 오고 있는 것을 보는데, 그 신병은 그 장교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이나 더 나은 자질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경례와 답례는 여전히 행해집니다.

이와 대조되는 일을 묵상해 보십시오. 저 교회의 감실로부터, 그대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대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그대에게 주시는, 완전한 하느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대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그대는 주님께 아무런 주의도 하지 않고 지나갑니다.

그대는 매일 성체를 조배하기 시작하였고, 그대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듣고 놀라지 않습니다. “저는 감실등을 미친 듯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겪으시는 모든 신성 모독에 대한 보속으로 매일 적어도 한가지의 영적 교섭을 만들도록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