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 목록

«밭고랑»에는 사도직를 주제로 하는 34 항이 있음.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대륙의 나라들을 생각했습니다.그리고 눈을 반짝이며 마음이 답답했던 당신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제게 말했습니다. 이 바다 건너편에서는 그리스도의 은총에 효과가 없다니 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나서 당신은 스스로 답을 내놓았습니다. 한없이 상냥하신 하느님은, 다루기 쉬운 도구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정말 가엾어라, 라고 당신은 생각했습니다.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외쳐주고 싶습니다. 왜 그렇게 눈이 멀었으며, 비참한 나에게조차 보이는 것이 왜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일까.왜 최상의 것을 바라지 않느냐고.

기도와 희생을 바친 후에-당신의 의무이니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눈을 뜨고 한 사람씩 설명해 주십시오. 당신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지금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걸어가시는 주님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고.

당당하게 분발하기 시작했지만 서서히 시들기 시작했습니다. 시야를 계속 좁힌다면, 머지않아 초라한 자신의 껍질에 갇히고 말 겁니다. 사사건건 마음을 넓혀 사도직에 대한 의욕을 높여야 합니다. 백 명이면 백 명이 모두 우리의 관심사이니 말입니다.

주님께서 항상 아버지나 어머니의 마음으로 당신을 잘 대해 주시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언제나 대모험을 꿈꾸던 당신은 훌륭한 사업, 당신을 거룩함으로 인도하는 사업에 참여하였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사도직에 힘씀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하십시오.

사도직으로 뛰쳐나갈 때에 확신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즉, 사도직이란 항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와 진정한 기쁨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나라와 다른 인종, 천차만별 환경과 직업 등의 사람들을 상대로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당신의 사도로서의 소명은 인간적으로나 초자연적으로 매우 값진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마침 주님의 제자들이 처음 가르침을 받들어 기적을 행하던 장면이 고스란히 재현된 듯합니다.새로운 길을 제시함에 있어 외국어로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속으로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당신의 뇌리에 생생하게 되살아난 것은, “바르티아 사람, 메대 사람, 엘람 사람”이 행복하다는 듯이 하느님께 다가갔다고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내 말을 잘 듣고 메아리처럼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이며, 하느님과 사귀는 것은 하느님과 가장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배려, 즉 사도직이란 사치스러운 것도 소수자의 일도 아니라는 것을.

이걸 알게 된 지금, 기뻐하십시오. 당신의 생활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에 따라 생활 방식을 갖추십시오

자연스러움, 성실, 기쁨. 이들은 곧 사도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들입니다.

“와서 나를 따르라.” 이것은 예수님의 첫 번째 열두 제자를 위한 부르심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한 호소가 있을 수 있습니까.

첫 번째 제자들은 부족한 지식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일 ‘사도직’을 계속하지 않기 위한 수많은 핑계를 찾고 있는 당신에게 손에 맞는 장갑처럼 해당합니다.

결코 잊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일을 하시는 것은 지금도 하느님이시라는 것. 다만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사도직으로서의 소명은 하느님이 보내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대는 계속해서 수단을 강구해야 합니다.즉, 기도, 희생, 공부 혹은 일, 우정, 초자연적인 시각… 내적 생활.

제가 말하는 ‘우정의 사도직’이란, ‘개인적이고’, 희생을 아끼지 않는, 성실한, 즉 일대일의, 진심어린 마음의 우정입니다.

우정과 신뢰(터놓고 하는 이야기)의 사도직의 첫걸음은 이해하는 것, 섬기는 것, 그리고 교리면에서 성스러운 비타협 태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당신 소명의 사도직적 깊이 속으로 매일 더 파들어가십시오. 주님께서는 당신과 제가 사람들에게 소리내어 선포하도록,

20세기 전에 선도(先導)하는 깃발을 올리셨습니다. 그것은 정녕 성실한 마음을 지니고 그리고 사랑의 실천이 가능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대는 이보다 무슨 더 분명한 초대가 필요합니까.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리고 저들 그리스도를 아직도 모르는

25억 영혼들의 생각에도!

“저에게는 저를 도와 줄 사람이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영적으로 병들고 마비된, 쓸모있을 수 있을 —그리고 쓸모 있어야 할 많은 사람들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제가 영혼들에게 무관심한 채로 남아있지 않게 하옵소서.

세상을 다시 한번 불붙게 할 새로운 성령강림절이 오도록 저와 함께 청하십시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 저는 매일 더욱 똑똑하게 보게 됩니다마는, 가족의 구속은 그것이 그대의 지극히 사랑스런 마음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일부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십자가의 근원이고, 그밖의 사람들에게는 다소 인내력을 거스르는 직접적인 유혹이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전직으로 비능률적인 이유이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한 자기포기를 해치는 극단적인 압력입니다.

땅을 파헤쳐 밭고랑을 내는 보습(밭가는 쟁기)은 씨도 못보고 수확도 못봅니다.

결심한 후 당신은 매일 새로운 발견을 하고 있습니다. 어제까지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이 일은 어떻게 되어야만 하는가?” 라고 끊임없이 자문했고, 게다가 그 후로도 의심과 실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언제나 조리 있고 분명하며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앳된 당신의 물음에 대해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를 보면서 당신은 문득 생각하게 됩니다.“예수께서는 틀림없이 이렇게 첫 열두 제자들을 돌봐 주셨을 것이다.”

소명을요, 주님 더 많은 소명을요! 를 뿌린 것이 나인지 다른 사람인지는 아무래도 좋습니다.—우리 손을 가지고 씨를 뿌린 것은, 예수님, 당신이셨습니다. 제가 아는 것이라 고는 당신께서 열매가 익게 되리라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열매는 오래 가리라”는 것입니다.

정직하십시오. 만약에 그대가 “그들을 잡으려고” 시도해 왔다고 그대에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것이 그대가 하려고 원하는 바임을 인정하십시오. 그러나 그들을 위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들이 소명을 얻지 않았다면 —만약에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오지 않을 것이고, 또 만약에 그들이 소명을 얻었다면, 복음서에 나오는 돈 많은 젊은 사람같이 끝내고 만다는 것은 그들에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혼자서 슬프게.

한 사도로서 그대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사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대는 은총과 하나하나의 영혼이 만나는 장소에서 당신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대는 또 저 일부 사람들의 생애에서 가장 엄숙한 기회인 그들이 그리스도와 만나는 데에 있게 됩니다!

당신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선택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맞아요

다음 점을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눈사태처럼 몰려와 "그럼,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날카롭게 묻고 정확한 대답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당신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에 그대의 사도적 정신을 효율적으로 만들어 줄 비결이 있습니다: 한 주일 전체를 위한 것이 아니고, 하루 앞을 위해, 이 순간과 그 다음 순간을 위해 정확한 계획을 세우십시오.

주님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봉사자로 자처하는 자들과 손에 손을 잡고 행진하는 일을 알게 되는 것은 몹시 슬픕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감정을 따라가기는 하지마는 하느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항해서 결속됩니다.

어떤 환경, 특히 지식인(인텔리)의 세계에서 여러 당파 공통의 지령과 같은 것이 중시되고 있으며, 이것이 명백히 감지되어 가톨릭 신자까지 이에 따를 때가 있습니다. 뻔뻔스럽게도 참을성 있게 중상을 계속하고, 그것을 펼쳐나가고, 모든 진리와 모든 논리에 어긋나면서도 교회와 사람에게, 또 조직에 대해 먹구름을 드리우는 것입니다.

매일 믿고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교회의 적을 표방하는 그들을 욕되게 하소서." 주여, 당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우리가 전파할 결심을 하고 있는 당신 빛의 밝기로 욕되게 하소서.

가톨릭신앙이 사고가 오래되고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까? 태양은 더 오래되었으나 그 빛을 잃지 않았고: 물은 더 옛것이기는 하나 여전히 갈증을 풀어 주고 우리들을 시원하게 해줍니다.

설령 좋은 목적을 위한 것일지라도 역사나 사람의 생애를 왜곡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교회를 박해한 적을 찬양하는 것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확신하십시오. 칭찬하지 말아야 할 일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서 역사적 진실에 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대체 언제부터 증오가 모범이 된 건지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는 대립감정을 불러일으키거나 또는 우리 교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해치거나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사랑을 실천해 나간다면, 그렇지 않았다면 누구이건 그리스도교에 반대하고 잘못으로 속임을 당했을 사람이 쉽게 그리고 정직하게 자신을 사랑의 실천에 참여시키면서 마무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순진한 “폭넓은 믿음”의 이름으로의 독단론에는 굴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 식으로 행동한다면 그는 자신을 성교회 밖으로 내쫓는 위험을 저지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익을 얻어내는 대신 자신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특이’하니, 그것은 이 세상의 것들과는 쉽사리 섞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속적인 현수막으로 사용될 때 아마도 가장 큰 ‘성가신 방해물’일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쉬운 말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적 능력이 부족한 곳에서도, 보다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는 성스러운 ‘간사함’을 청하십시오.

저를 믿으십시오. 교리를 일러 주는 사도직은 통상, 이를테면 모세혈관같이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각 신자로부터 그 바로 곁의 친구에게로 퍼져나가야 합니다.

영혼마다 다 중요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들은 모든 영혼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대의 입술이 하느님을 거스르는 어떠한 무례한 말도 내지 않도록, 조언을 주시는 성모이신 복되신 동정녀께로 피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