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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예수 그리스도 → 성심 항이 있음.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의 성심(聖心)을 통해 “사랑이라는 무한한 보물”과 자비, 그리고 자애(慈愛)를 우리에게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찾고자 한다면, 그분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이미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바오로 성인의 생각을 똑같이 쫓아가면 됩니다.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로마 8,32)

주님의 은총은 인간을 내부로부터 변화시킵니다. 죄인과 반역하는 이들을 착하고 성실한 종으로 바꾸십니다. 그 모든 은총의 원천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분께서는 말씀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이러한 진실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성삼위의 제2격이신 성자로 하여금 말씀이 사람의 육신을 취하게 한 것도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성자께서는 죄를 제외한 모든 인간의 상태를 그대로 가지신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 이전에 그분의 사랑이 먼저 계신 것입니다.

사랑은 주님의 강생(降生)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걸으신 구원의 여정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그 구원의 여정은 십자가의 희생으로 정점에 이르지요. 주님의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새로운 징표를 통해 저절로 나타납니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요한 19,34) 예수님의 이 물과 피는 우리에게 ‘자기희생’을 얘기합니다. 주님의 이 희생으로 모든 것이 이뤄집니다. “다 이루어졌다” (요한 19,30) 곧, 사랑으로 모든 것이 이뤄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네 신앙의 핵심적 신비에 관해 한번 더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가장 심오한 진실을 표현하는 데에 인간의 행동들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보며 놀라고 있습니다. 당신 아드님을 희생시키신 성부의 사랑, 말없이 자신을 갈바리아산(골고타)으로 이끄신 성자의 사랑, 바로 이 사랑이 가장 심오한 진리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능과 귄위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필리 2,7)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거나 냉담한 분이 절대 아닙니다. 비록 가르침을 주시는 중에 이따금 매우 슬퍼 보이긴 하지만, 그것은 악인들이 그분께 상처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분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내 당신의 분노조차도 사랑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우리로 하여금 부정(不貞)과 죄(罪)를 내치도록 하려는 보다 심오한 초대입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에제 18,23)

이는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마음으로 오셨는지를 이해하게 해줍니다. 예수님의 마음, 즉 성심은 주님 사랑을 확인해주는 명확한 증거이며,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끊임없이 증명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을 알아보는 것 

여러분께 털어놓을 것이 있습니다. 저를 매우 유감스럽게 만들어 행동하게 하는 어떤 것에 대한 얘깁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엄청난 행복에 관해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 관한 생각입니다. 그들은 이름도 모르는 기쁨을 찾으려고 눈먼 사람들처럼 살아갑니다. 그들은 진정한 행복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길 위에서 방황합니다. 이들 중 어느 누가 트로아스에서 꿈에 환시를 본 뒤 바오로 사도가 가졌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오로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저희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청하는 것이었다. 바오로가 그 환시를 보고 난 뒤,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떠날 방도를 찾았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사도 16, 9-10)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통해서 그분께서는 우리를 재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따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을 별것 아닌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상적으로 불화와 질시 속에 시간을 낭비합니다. 훨씬 더 나쁜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지닌 신앙이나 신심의 특정한 측면을 꼬투리 잡아 억지로 분노하곤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는 대신 파괴를 일삼고 비판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우리는 가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심각한 문제점들을 발견합니다. 그런 문제들이 있는 게 사실이기도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이나 우리들의 단점이 아닙니다. 진짜로 중요한 유일한 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얘기해야 하는 주제는 우리들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예수님의 성심을 공경하는 데 있어서 위기가 닥쳤다는 추측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위기가 아닙니다. 예수 성심에 대한 진정한 공경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진정으로 살아 있으며, 인간적인 동시에 초자연적인 의미로 충만합니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를 회개와 자기희생으로 이끌며,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구원의 신비를 사랑하며 이해하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정한 성심 공경과 쓸모없는 감상의 표현을 구별해야 합니다. 정통교리가 배제된 허울뿐인 신심과도 구분해야 합니다. 여러분 못지않게 저도 그저 보기에만 그럴듯한 가식적인 예수성심 조각상이나 모형 같은 것들을 싫어합니다. 그런 것들은 일반적인 상식과 그리스도인의 초자연적 관점을 함께 지닌 사람들에게 공경의 마음을 전혀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이런 특별한 문제들은 앞으로 사라지게 되겠지만, 이를 일종의 교리나 신학적 문제로 돌리는 것은 그릇된 논리입니다.

만약 실제로 위기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 마음속의 위기입니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편협하며 워낙 시야가 좁아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사랑의 깊이를 실감하지 못합니다. 성교회가 ‘예수 성심 대축일’을 제정한 이후 대축일 전례는 바오로 성인의 서간을 독서에 포함시킴으로써 참된 신심의 양식을 제공해왔습니다. 오늘 독서 말씀에서 바오로 성인은 지식과 사랑, 기도와 생활을 아우르는 ‘관상하는 삶’의 전체적인 흐름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러한 관상의 삶은 예수 성심께 대한 공경으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도의 말씀을 통해 다음과 같은 여정을 우리가 따라오도록 초대하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에페 3,17-19)

하느님의 충만하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사랑 안에서 드러나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머무르는” (콜로 2,9) 곳이 바로 예수 성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강생과 구원, 그리고 성령 강림을 통해 이 세상에 넘쳐 흐릅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의 이 위대한 계획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섬세한 사랑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나인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물론 다른 예들도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장면들로 넘쳐나니까요. 각각의 사건들마다 벗이 아파할 때 함께 고통받는 한 인간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우리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된 교회는 상처 입으신 성심으로부터 태어났다네.” 활짝 열린 이 예수 성심으로부터 생명이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비록 잠시 지나치는 생각일지라도 여기서 우리는 성사(聖事)들을 떠올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사들을 통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힘을 우리가 더불어 나누도록 해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체성사를 떠올릴 때마다 어떻게 특별히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성체성사는 갈바리아산의 거룩한 희생이며, 동시에 그 거룩한 희생이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 안에서 피 흘리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의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힘을 얻었고, 그 힘이 우리 영혼을 가득 채우며, 우리의 모든 활동과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방식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스도의 성심은 곧 그리스도인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를 내어놓을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러한 ‘자기 증여’의 원천은 단순히 우리들 자신의 열망이나 노력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열망과 노력은 수시로 흔들리고 허약하니까요. 자신을 내어주는 삶은 우리에게 주신 은총으로부터 힘을 얻습니다. 그 은총은 인간을 만드신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마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내적 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결코 낙담하거나 의기소침해선 안 됩니다. 저는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일상 삶에서, 가장 소박한 생활의 구석구석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지 생각해달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지해 살아가는 인간 행동의 본질이 바로 그 물음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학적 미덕들을 실천해가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은 기쁨과 힘과 평화를 찾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의 결실입니다. 그분의 성심이 우리에게 주신 평화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해봅시다.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거룩한 신비입니다. 성부와 성령을 향한 성자의 사랑 또한 불가해합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를 이어주는 사랑의 끈이신 성령께서는 말씀 안에서 인간의 마음과 만나시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이런 핵심적 요소들을 얘기할 때면, 우리들 사고(思考)의 한계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계시(啓示)의 위대함을 함께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을 한참 넘어서는 이러한 진리를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겸허하고 확고하게 이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증거들을 통해 진리임을 압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마음 깊이 계신 사랑이 인간에게 내리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 성심 안에 계신 사랑에 의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