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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예수 그리스도 → 수난과 죽음 항이 있음.

그리스도인들이 전통적으로 성주간이라고 부르는 이번 주간에 우리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집니다. 바로 예수님 삶의 마지막 시간들을 되돌아보고 다시 체험하는 기회입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신심을 나타내는 다양한 표현들입니다. 그런 표현들이 우리 마음에 불러오는 것들은 예외 없이 당연하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지향합니다. 그분의 부활이야말로 바오로 성인의 말씀대로 우리들 신앙의 밑바탕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여정을 너무 서둘러 걸어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매우 간단한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안에서 그분과 일치를 이루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부활을 더불어 나눌 수 없을 것입니다. 성주간의 말미에 주님의 영광 안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려면, 우리는 우선 번제물(燔祭物)이 되신 그분의 안으로 들어가 진실로 주님과 하나가 돼야 합니다. 그분이 갈바리아산에서 돌아가셨을 때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고결한 자기희생은 죄에 대한 도전입니다. 죄의 존재를 결코 부정할 수 없지만, 죄의 실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죄는 그야말로 죄악(罪惡)의 신비(mysterium iniquitatis)를 보여줍니다. 이는 피조물이 범하는 설명할 수 없는 죄악입니다. 피조물 자신의 교만함이 스스로를 하느님께 대항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인류만큼이나 오래됐습니다. 인류의 원조(元祖), 즉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함께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후 시대가 흐르면서 인류의 활동 여기저기서 끝없는 타락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들 각자가 개별적으로 하느님을 거스르기에 이르렀습니다. 죄라는 것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깨닫기란 정말로 어렵습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이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는 건 참으로 힘듭니다. 인간적인 맥락에서도 죄의 경중(輕重)은 피해자의 중요도에 따라, 그러니까 그 죄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자격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런데 하물며 인간이 죄를 지어서 하느님께 상처를 드렸다면 어떻겠습니까! 피조물이 창조주를 부인했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사랑”(1요한 4,8)이십니다. 인간의 죄악이 짊어진 악의 심연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극복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잘못을 보속하고, 무너져버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일치를 다시 세우려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이런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는 구약의 번제물로는 충분치 않았습니다. 하느님이신 인간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상상해본다면 이 불가해한 신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세 위격께서는 서로 방해하지 않으시면서 무한한 사랑의 친교 안에 함께하십니다. 삼위일체께서 내린 불변의 결정에 따라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드님께서 인간성을 취하시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우리가 겪어야 할 참혹한 슬픔의 짐을 견디셨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이후 그리스도의 모든 삶은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실현하고자 하는 불타는 열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분과 함께 3년 동안 살았던 사도들은 계속해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라는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당신의 희생제사가 완결되신 첫 성금요일 오후까지도 그 가르침은 계속되었습니다.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요한 19,30)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잘못을 홀로 지시고 그 무게에 짓눌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순전히 우리의 죄가 저지른 폭력과 사악함 때문에 쓰러지신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상처 입으신 주님을 묵상합시다. 어떤 문구도 당시의 실제상황을 완전히 표현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진실에 가까운 표현을 사용하자면 오래전 어느 작가가 쓴 글귀를 인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육신은 고통의 자화상이다.” 생명을 잃은 그분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져 어머니 성모님께 전달됐습니다. 그때 멍들고 으스러진 그리스도를 보고, 그렇게 파괴된 예수님을 보고, 우리는 아마도 그분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한때 그를 따르던 군중은 어디에 있으며, 그가 예언했던 왕국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바로 승리였습니다. 결코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부활에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당신의 순명으로 이루신 승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이해 

제가 방금 말씀드린 여담의 목적은 오직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 한 가지를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느님 안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되새겨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가능한 한 가장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인간이 창조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더 심오한 목적을 위해 이 땅에 왔습니다. 바로 하느님 당신과 통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편한 삶이나 세속적인 성취를 우리에게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네 여정의 마지막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하느님 아버지의 집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성금요일의 전례에는 ‘믿음의 십자가(Crux fidelis)’라는 제목의 놀라운 성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가 ‘믿음의 십자가’는 십자가의 승리자이신 우리 주님의 영광스러운 분투를 노래하고 찬미하게 합니다. 온 우주를 구원하신 구세주께서는 희생 제물이 되셨고, 승리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의 주님이신 하느님께서는 무력(武力)이나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의 세속적 권능을 통해 당신의 현존을 느끼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무한하신 당신 사랑의 고귀함으로 주님의 현존을 감지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멸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분은 바로 당신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가 억지로 당신께 순명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결정이 우리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우리의 행동을 통해, 갈바리아산에서 펼쳐진 사랑의 드라마를 떠올릴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온갖 약점과 실수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맛을 내는 소금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행복한 소식을 전하는 빛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빛이 전하는 행복한 소식이란, 당신이 인간을 엄청나게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진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무언가에 승리했거나 무엇을 정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제 맛을 내지 못한다면 결코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스스로의 말과 본보기를 통해 예수님을 증거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자기 삶의 목표를 잊어버린다면, 그는 결코 빛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죽음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죽으심의 외적인 모습과 그에 대한 진부한 표현들을 뛰어넘어 그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주간의 이 며칠 동안 우리가 다시 체험하는 그 장면들 속으로 우리 자신을 진심으로 들여보내야 합니다. 우리가 들어가 체험해야 할 그 장면에는 예수님의 슬픔과 성모님의 눈물, 그리고 사도들의 도망과 거룩한 여인들의 용기가 있습니다. 또한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했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니코데모의 대담함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그분께 가까이 다가갑시다. 그리고 골고타 언덕 꼭대기에서 어렴풋이 드러나는 그분의 십자가에 다가섭시다. 우리는 그분께 진심으로 가까이 가야 합니다. 또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징표인 내적 기도로 그분께 다가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 수난의 거룩하고도 인간적인 사건들이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처럼 우리의 영혼을 관통할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비밀을 드러내시고, 하느님께서 우리 삶에서 기대하시는 바를 보여주시기 위해 건네시는 그분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몇 년 전에 저는 어느 그림을 보았는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 옆에 세 명의 천사들이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한 명은 절망에 겨워 울고 있었고, 또 한 명은 마치 예수님의 죽음이 사실임을 스스로에게 애써 납득시키려는 듯이 한 손에 못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천사는 온 힘을 다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그림 속에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울고,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와 모든 인류의 죄 때문에 슬퍼해야 합니다. 그 죄로 인해 예수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이 장엄한 진리 깊숙이 우리의 신앙이 스며들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신앙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하느님 사랑에 대한 놀라움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우리들 자신의 삶과 희생의 본보기이자 동기가 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승리자의 이름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승리하실 것이며, 그로 인해 죽음은 삶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 그리스도인들의 어머니 

1935년 이후 저는 여러 차례 성모성지를 방문하는 동안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어머니께 가진 놀라운 애정을 떠올리며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애정을 성모님께 대한 사랑의 응답, 그러니까 성모님께 드리는 자녀로서의 사랑이자 감사라고 여겨왔습니다. 즉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드리는 애정 표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 사랑의 가장 위대한 징표와 아주 깊이 연관돼 있으시니까요. 하느님 사랑의 가장 위대한 징표란 바로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스스로 우리 인간의 죄와 나약함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당신이 태어나신 거룩한 목적에 충실하심으로써 성모 마리아께서는 인간에게 봉사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투신하셨습니다. 인간은 당신 아들 예수님의 형제가 되도록 부르심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어머니는 또한 참으로 인간의 어머니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성모님이 모든 인간의 어머니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미래 세대들도 그 사실을 알기를 바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요한 성인에게 영감을 주셔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어,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 19, 25-27).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자신의 삶 속으로 모신온 것이지요. 영성가들은 복음에 나오는 이 말씀을,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성모 마리아를 그들의 삶 안에 모시도록 초대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확실히 우리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확신에 차서 당신께 다가오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당신이 우리 어머니이심을 보여주소서”라고 간청하며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알고 당신께 호소하길 바라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의 간청을 미리 아시는 어머니이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바를 알고 계시기에 우리를 돕기 위해서 아주 빨리 오시는 분입니다. 성모님의 손길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온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성모님이 우리 어머니라고 느낄 수 있는 여러 이유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신 평화 

그러나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를 여러분께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해 열정을 다해서 분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이유를 얘기하자면, 우리 인간이 진정 정의로워지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이 맺는 관계들이 증오와 무관심이 아닌 사랑에 의해 영감을 받으려면 너무 먼 길을 가야 하는 까닭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깨우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설사 우리가 부의 합리적 분배와 조화로운 사회조직을 이루어낸다 하더라도 여전히 세상에는 병마와 오해, 고독, 사랑하는 이의 죽음,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한계를 절감(切感)해야 하는 고통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고통의 무게와 마주 서서 그리스도인이 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정한 해답, 유일하고 결정적인 답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모두를 사랑하셔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신 하느님입니다. 창에 찔린 채 당신의 성심을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불의를 미워하시며 불의를 저지른 이들을 꾸짖으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개개인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불의가 발생하도록 그냥 두셨습니다. 왜냐하면 불의는 원죄의 결과로서 인간 조건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성심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우리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간절히 정의를 바라는 배고픔과 갈증… 그분은 이 모든 아픔들을 십자가를 통해 당신 홀로 온전히 짊어지셨습니다.

고통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선 모든 인간의 삶에서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아픔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신 소명입니다. 여러분께 숨기지 않겠습니다. 제 인생에도 자주 아픔이 있었고, 몇 번이고 정말로 울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얘기를 여러분께 기쁘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만나야 한다는 진리를 항상 강론해왔고, 또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불의와 악(惡)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열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상황을 치유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과도 맞서 싸워왔습니다.

고통에 관해 얘기할 때 단순히 이론만 말씀드리고 있지 않습니다. 고통과 맞닥뜨려서 여러분의 영혼이 흔들린다고 느낀다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최선의 치유책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릴 때 저는 다른 사람의 경험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갈바리아산의 수난 장면은, 고통은 거룩하게 변모해야 하며 우리는 십자가와 하나 되어 살아야 한다는 진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려움을 참고 견딘다면, 그 어려움은 속죄(贖罪)와 배상(賠償)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 어려움은 또한 예수님의 운명과 그분의 생명을 우리가 함께 나누도록 해줍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은 인간의 모든 고통과 고뇌를 스스로 기꺼이 겪어내셨습니다. 그분은 가난하게 태어나고, 생활하고,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공격받고, 모욕당하고, 헐뜯기고, 중상모략에 걸리고, 부당하게 비난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이 당신을 배신하고 버릴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고독을 실감했고 형벌과 죽음의 고통을 체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동료들과 함께, 그리고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고통받고 계십니다. 인류의 머리이자 맏이이시며 구원자이신 그분께서 같이 아파하고 계신 것입니다.

고통은 하느님 계획의 일부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긴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도 수난을 견디기 힘드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루카 22,42)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간청하며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십자가에 매단 이들을 용서하시면서 묵묵히 죽음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이처럼 고통을 초자연적으로 받아들이며 그분은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가져오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가져야 할 자세는 닥쳐올 비극적 운명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승리를 예감한 사람의 성취감입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 나아가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통해 평화와 기쁨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악과 불의와 죄에 맞서 평화의 투쟁을 벌여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현재 처해 있는 형편이 결코 확정된 상태가 아님을 공표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성심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만이 인간의 영광스러운 영적 승리를 얻게 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