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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예수 그리스도 →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항이 있음.

하느님의 자비 

오늘은 대림 시기의 시작을 알리는 날입니다. 이날을 맞아 ‘영혼의 적’들이 부리는 농간에 관해 생각해보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 ‘관능의 무질서’, ‘무사태평한 피상성(皮相性: 진실을 추구하지 않고 겉모습만을 보고 내리는 판단)’, ‘하느님을 거부하는 이성의 어리석음’, ‘하느님과 당신의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을 훼손하는 무신경한 오만’ 등이 바로 그런 농간들입니다. 이 모든 영혼의 장애물들은 매우 현실적이며 실제로 엄청나게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전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며, 우리가 입당할 때 기도한 대로 다음과 같이 간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께 제 영혼을 들어 올립니다. 저의 하느님 당신께 의지하니 제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제 원수들이 저를 두고 기뻐 날뛰지 못하게 하소서.” (시편 25,1-2) 우리는 또한 봉헌예식 때도 같은 바람을 되새깁니다. “당신께 바라는 이들은 아무도 수치를 당하지 않으니” (시편 25,3)

우리들이 구원받을 시기가 다가오기에 바오로 성인의 말씀이 위로처럼 들립니다.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 구원하신 것입니다.” (티토 3,4-5)

성경을 대충만 읽어봐도 여러분은 ‘하느님 자비’에 관한 언급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땅을 가득 채우고, 당신의 모든 자녀들에게 미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 주위에 넘치며, 자비의 눈이 내게 머무르십니다.”(시편 33,18), 우리를 도우시기 위한 당신의 자비는 “하늘에 닿아 있고.” (시편 36,6), 그 자비는 언제나 “굳건합니다.” (시편 117,2).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 안에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그분의 자비는 “자애롭고” (시편 25,6), “가뭄의 비구름처럼 반갑습니다.” (시편 117,2)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하느님 자비의 이야기를 요약한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태 5,7) 우리 주님께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 복음서의 다른 많은 장면들도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심, 돌아온 탕자의 예화, 잃어버린 양의 비유, 빚을 탕감 받은 채무자, 그리고 나인 고을에 사는 과부의 외아들을 되살리신 사건 등등.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기적을 행하셔야 했던 많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느 가난한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죽은 아들은 어머니가 살아가는 의미였습니다. 살아 있었더라면 노년에 어머니를 보살폈겠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정의가 아닌 연민(憐憫)으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인간의 고통에 당신의 마음이 움직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생각하면 우리가 평안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 줄 것이다. 나는 자비하다.” (탈출 22,26) 이 말씀은 당신께서 우리의 간청을 반드시 들어주시겠다는 초대인 동시에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히브 4,16)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앞에 있는 한 우리의 성화(聖化: 거룩하게 됨)를 방해하는 적들은 힘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우리 자신의 잘못과 인간적 약점 때문에 우리가 쓰러진다 해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태만하지 않고 오만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웠습니다. 또한 경건하며 성숙하고, 세속적 것들의 포로가 되지 않으며, 덧없이 지나쳐가는 것보다 영원한 것을 선택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의 나약함 때문에 이 헛발 딛기 쉬운 세상에서 자신의 발걸음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훌륭한 의사를 보내어 처방하게 하시고, 절망에 빠져 용서를 청하지 않도록 자비로운 재판관을 통하여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유혹 받으시다 

사순시기는 당신의 공생활을 준비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보내신 40일을 기리는 기간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승리로 절정을 맞이할 주님의 공생활을 준비하신 광야의 시기를 기념하는 것이지요. 40일의 사순시기는 기도와 참회의 기간입니다. 끝으로 전례에 따른 오늘의 복음 말씀을 떠올려 봅시다. 바로 그리스도의 유혹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인간이 감히 이해하기를 바랄 수 없는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유혹을 받으시고, 악(惡)이 멋대로 설치게 놔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가르침을 이해하도록 도와달라고 주님께 간청하면서 이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혹 당하시다… 전통적으로 광야에서 겪은 그리스도의 시련을 이런 식으로 바라봅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의 모범이 되신 주님께서는 유혹에 시달리는 일 또한 스스로 원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죄가 없다는 것 말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완벽한 인간이므로 우리와 똑같이 유혹 받으시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마도 약초와 풀뿌리 조금, 그리고 약간의 물 말고는 다른 어떤 음식물도 없이 40일간 금식하셨기에 예수님은 허기를 느끼셨을 겁니다. 보통의 인간들이 그렇듯 그분도 정말로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마가 돌멩이를 빵으로 바꿔보라고 제안할 때 예수님은 당신의 육신이 갈구하는 음식을 거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더욱 큰 유혹을 뿌리치십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당신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의 거룩한 힘을 쓰라는 유혹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복음서 전체를 보면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어떻게 일으키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카나의 결혼식에서 축하객들을 위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고, 배고픈 군중을 위해 빵과 물고기를 많아지게 하십니다. 그렇지만 당신 자신은 수년간 스스로 일을 하셔서 생계를 꾸리십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땅을 돌아다니며 공생활을 하시는 중에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생활하십니다.

복음사가 요한 성인은 긴 여행을 하신 뒤 예수님께서 ‘시카르’의 우물에 도착하셨을 때 제자들을 고을로 보내 먹을 것을 사오게 하셨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이 오는 것을 보자 예수님은 그녀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하십니다. 부탁하는 방법 말고는 물을 얻을 길이 없었던 겁니다. 오래 길을 걷느라 지친 당신의 육신이 피곤을 느끼신 것입니다. 다른 경우였다면 그분은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잠을 청해야 하셨겠죠. 당신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셔서 인간의 육체적 상태를 온전히 받아들이시는 우리 주님은 얼마나 너그러우십니까! 그분은 자신의 고충이나 노고를 피하기 위해 당신의 거룩한 힘을 절대 쓰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우리가 강인해지도록, 우리가 우리의 일을 사랑하도록,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 노력한 결과를 음미할 수 있는 인간적이면서도 거룩한 고귀함을 깨닫도록 말입니다.

두 번째 유혹에서 악마는 예수님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권능을 사용하라는 악마의 제안을 다시 한번 거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겉으로 드러내는 허영(虛榮)을 좇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 자신의 장점을 내보이는 배경으로 하느님을 이용해선 안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셨지만, 하느님의 계획을 미리 예상하지도, 기적의 시기를 앞당기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오직 인간의 고된 길을, 십자가로 나아가는 사랑의 여정을 묵묵히 걸어가셨을 뿐입니다.

세 번째 유혹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왕국과 권력과 명예를 제안받습니다. 악마는 이제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야 할 신심(信心)마저도 인간의 야욕으로 돌리기 위해 열을 올립니다. 이렇게 악마는 편안한 삶을 우리에게 약속합니다. 우리가 악마 앞에, 우상 앞에 무릎 꿇기만 하면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참으로 경배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하느님뿐이라고 역설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만을 섬기겠다는 당신의 다짐을 명확히 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마태 4,10)

이 모든 인간적인 행동이 바로 하느님의 행동입니다.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콜로 2,9)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십니다. 완전하고 완벽한 한 명의 인간이십니다. 그 인간적 본성을 통해 그분은 우리에게 하느님이신 당신의 거룩한 본성을 보여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당신의 온 삶을 바치셨습니다. 그분의 이런 인간적인 고결함을 되새기며, 우리는 인간적 행위의 한 형태를 설명하는 일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들은 초월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그분이 하신 일들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본성을 보여주며 하느님의 사랑을 믿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가 당신의 무한한 생명을 나누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이제 이들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 17,6-7)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맺으신 관계는 피상적인 말이나 태도를 훨씬 넘어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시고, 그들 삶의 거룩한 의미를 깨우쳐주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방법을 알고 계시며, 어떻게 하면 그들을 자신들의 임무와 마주하게 할지를 아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편안함에 안주하는 순응적 태도에서 벗어나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을 알게 해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배고픔과 슬픔에도 마음이 움직이시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르는 것을 가장 가엾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마르 6,34)

오늘의 전례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신 그리스도 삶의 마지막 순간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합니다. 마지막 순간이란 바로 예수님의 승천(昇天)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이후에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구유에 계신 그분을, 목동들과 동방박사들에게 경배 받으신 그분을 생각했습니다. 또한 나자렛에서 드러나지 않게 노동하며 보내신 긴 세월을 묵상했습니다. 또 그분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며 모두에게 좋은 일을 하실 때, 우리는 그분과 줄곧 동행했습니다. 그 후 우리는 예수님께서 수난 받으신 시기에 그분이 고발되고, 폭행당하며, 끝내 십자가에 달리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파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슬픔은 부활의 기쁨과 빛으로 바뀌었습니다. 부활은 그야말로 우리들 신앙의 명확하고도 확고한 바탕입니다. 하지만 아마도 당시의 사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승천의 날에 우리는 그리스도께 묻습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 (사도 1,6) 우리의 당혹함과 나약함이 모두 사라지는 날은 대체 언제일까요?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에 오르시는 것으로 우리에게 대답하십니다. 사도들처럼 우리는 당신께서 하늘로 떠나셨음에 감탄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슬픕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우리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에 익숙해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떠나셨을지라도 넘치는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저는 감동합니다. 그분은 천국에 가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거룩하게 축성된 빵의 모습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 양식으로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당신의 인간적인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당신께서 행동하고, 바라보고, 웃으시고, 좋은 일을 하시는 모습들을 그리워합니다. 우리는 예전으로 돌아가 또다시 그분을 가까이서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긴 여정에 지치셔서 우물가에 앉아 계시는 당신을 (요한 4,6), 라자로의 죽음에 눈물 흘리시던 당신을 (요한 11,35), 긴 시간 기도하시던 당신을 (루카 6,12), 군중을 가엾게 여기시던 당신을 (마태 15,32) 곁에서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장 거룩한 인성(人性 또는 인간성)이 아버지의 영광을 향해 승천해야 한다는 사실은 제게는 언제나 매우 논리적으로 느껴집니다. 주님의 승천은 항상 저를 아주 행복하게 합니다. 그러나 승천의 그날에 특별히 맛본 슬픔 또한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가 느끼는 사랑의 증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분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육신을 가지셨고, 우리와 똑같이 당신의 혈관에 피가 흘렀던 완벽한 인간이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를 떠나 천국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러니, 우리와 함께 계셨던 그분을 어떻게 그리워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