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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예수 그리스도 → 나자렛 생활 항이 있음.

예수님의 삶에서 일어난 다른 여러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숨겨진 시간들을 묵상할 때도 우리는 언제나 감동하게 됩니다. 이 30년의 시간은 우리의 이기심과 나태함을 털어내라는 부르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한계와,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마음과, 우리의 욕망을 알고 계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스스로를 내어주는 것이 인간에겐 참으로 어려운 일이란 사실을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또한 사랑을 찾을 수 없을 때의 심정이 어떤지, 입으로는 주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반쯤 무관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 그 기분이 어떤지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복음사가들이 묘사한 인상적인 장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세속적인 욕망에 가득 차고 오직 인간적인 계획에만 몰두하는 사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도들을 가까이에 두시고 당신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을 그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이 우리를 부르시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물으 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묻습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마태 20,22) 여기서 ‘잔’이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여러분 자신을 바칠 수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그때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습니다.(Possumus!). 우리는 준비돼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그럴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모든 일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의 온 마음을 주님께 드렸던가요? 아니면 하느님이 아닌 우리들 자신에 얽매이고, 우리의 이익과 편안함, 그리고 자기애에만 집착하고 있나요? 우리 생활 속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요? 우리의 길을 그리스도인답게 바꾸는 것을 꺼리게 만드는 무엇이 있는 겁니까? 다행히 이 모든 것을 올곧게 바로잡을 기회가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이 질문들을 우리에게 개별적으로 주셨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질문을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인 것입니다. 저는 감히 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큰 소리로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각자 마음속으로 조용히 우리 주님께 고백하십시오. “주님, 제가 얼마나 쓸모없는 인간인지요, 얼마나 겁쟁이인지요! 얼마나 많은 실수를 거듭해왔는지요.” 그러고 나서야 조금 더 나아가 주님께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뭐 괜찮습니다. 주님, 당신의 손길로 저를 지켜주고 계시니까요. 만약 저를 그냥 내버려두신다면 저는 정말로 최악의 수치스러운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저를 내버려두지 마세요. 어린아이처럼 저를 보살펴 주십시오. 저는 강하고 용감해지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저를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저는 보잘것없는 피조물입니다. 주님, 제 손을 잡아 이끌어 주십시오. 당신의 성모님께서 항상 제 곁에서 지켜주시도록 해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면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possumus!)! 당신을 우리의 본보기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결코 주제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거룩한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우리가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인간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그 거룩한 길을 인간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길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그렇게 낮추신 이유입니다. “그분이 당신 자신을 그리도 낮추셔서 종의 모습을 취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 주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존재셨지만, 자신의 위엄과 권능을 스스로 낮추셨습니다. 그러나 선함과 자비는 그대로이셨습니다.”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그 거룩한 길을 우리가 쉽게 갈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초대를 거부하지 맙시다. 그분께 “아니요.”라고 말하지 맙시다. 그분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하지 맙시다. 핑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지 못할 거라고 더 이상 생각하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범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온 마음을 다해 여러 형제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귀중한 본보기를 무시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예수님을 따르고 성령 안에서 여러분의 영혼을 새롭게 하십시오.”

그 많은 선행을 하시기 위해, 어디에서든 오직 좋은 일만을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하셨을까요? 복음 속 예수님의 또 다른 전기(傳記)를 통해 우리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루카 2,51) 우리는 특히 이 ‘순종’이라는 말에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거역하고 반항하며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분열하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제가 ‘순종’이라는 그리스도교의 미덕을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제 마음속 깊이 ‘자유’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아버지의 뜻을 우리가 이룰 수 있기를 원해야만 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대로 모든 일을 해내야 하되 우리가 스스로 그냥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에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단순히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만 하는 가장 초자연적인 이유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35년 이상 오푸스데이의 영성을 실천하고 또한 가르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오푸스데이의 영성은 제가 개인의 자유를 이해하고 사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 주님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을 주실 때, 특별한 소명으로 우리를 부르실 때, 그것은 마치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가득한 손을 우리에게 내미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아들, 딸로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따로 찾으십니다. 우리의 연약함도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건네신 주님의 손이 사랑으로 넘치는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건넨 도움의 손길을 우리가 잡으려고 애쓰기를 기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노력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우리가 자유롭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라고 당부하십니다. 이 일을 우리가 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겸손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어린아이들 이란 진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경이로운 부성애에 순종으로 응답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축복받은 순종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들어오시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 있게 그분께 고백하며, 그분이 우리 삶에 들어오시는 길에 놓인 모든 장애물과 복잡한 문제들을 치워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간섭받지 않으려 하고 이기심에 얽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왕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 왕의 자리가 인간들의 비참한 왕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께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가가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만들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과 온 인류를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오로 성인이 하신 말씀의 진리를 깨닫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6,22-23).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의합시다. 우리는 늘 이기적인 성향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유혹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순종함으로써 신앙을 드러내 보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뜻을 떠들썩하게 표현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때로는 우리 양심 깊은 곳에 당신의 뜻을 속삭이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주의 깊게 귀 기울이고 그분께 충실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종종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들의 결함을 먼저 봅니다. 또는 그들이 문제를 잘 알지 못하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려는 유혹에 빠지는 거죠. 그러나 이런 행동들 역시 거룩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맹목적인 순종을 강요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지성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가진 지성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에 대해 모든 경우를 검토하며 진지하게 생각해봅시다.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과연 진리에 대한 사랑입니까? 아니면, 우리들 자신의 판단에 얽매이는 이기심과 집착입니까? 우리의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우리를 떼어놓는 것이라면, 우리의 공동체와 형제들과의 일치를 약화시킨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확실한 징표인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순종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보기를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 그분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셨습니다.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들에 순종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정하건대 두 분은 매우 완벽한 피조물입니다. 우리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을 제외하면 누구보다도 위대하십니다. 그리고 요셉 성인은 가장 순결하신 분입니다. 하지만 그분들도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그분들에게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우리에게 주신 그분의 뜻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네 평범한 삶의 의무들을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인생의 여러 상황에서 우리가 져야 하는 의무들, 직업의 의무, 노동과 가정, 사회생활의 의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보살피는 의무, 친교의 의무, 그리고 옳고 정의로운 일을 하고자 하는 열망의 의무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여러 번 강조했던 예수님의 솔직하심과 소박하심에 관해 다시 한번 얘기하겠습니다. 그분의 숨겨진 시간들이라고 해서 결코 중요하지 않은 기간이 아니었으며, 단순히 다가올 공생활을 준비하는 기간도 아니었습니다. ‘오푸스데이’를 시작한 1928년 이후 저는, 하느님께서 주님의 삶 전체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본보기가 되기를 바라셨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하게 됐습니다. 특히 그분이 평범한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신 그 숨겨진 세월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됐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조용하고 평범한 생활 속에서 자신들의 성소를 인정하길 원하십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려면 당연히 우리의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자신을 일상의 삶으로부터 분리시킬 이유는 없습니다. 일상의 삶을 사는 평범한 우리들은 누구나 나름의 계층과 일,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수많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꿈을, 그들의 동료와 친구들과 더불어 열망과 노력을 나누는 꿈을 꿉니다. 그리고 그 꿈은 이뤄졌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이 거룩한 진실에 관해 소리쳐 얘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잊었다거나, 여러분을 부르신 적이 없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활동과 관심 속에서 살아가도록 여러분을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직업과 직종, 재능이 하느님의 거룩한 계획으로부터 결코 벗어나 있지 않은 것임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들을 성화하셔서 당신 아버지께 드리는 가장 기쁜 봉헌으로 만드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