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 목록

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예수 그리스도 → 기적 항이 있음.

우리는 오늘 미사에서 방금 요한 성인의 복음 말씀을 읽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치유의 기적을 베푸신 장면입니다.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에 우리 모두 다시 한번 감동받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불행을 무심하게 바라보지 못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려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특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엄존할 때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결코 무관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존경심을 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움츠러들 때,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무분별하고 무자비하게 침해할 수 있는 위험이 움튼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요한 9,1) 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자비를 이렇게 간단하게 묘사하는 성경 말씀에 저는 자주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딘가로 가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인간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분의 제자들이 보인 반응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요한 9,2)

충동적인 판단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조차 제자들과 똑같이 행동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첫 번째 충동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증거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 생각을 혼자만 하지도 않습니다. 자신들의 성급한 판단을 여기저기 퍼뜨립니다.

제자들의 행동을 그나마 호의적으로 보자면, ‘근시안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시종일관 그런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는 바리사이 같은 자들이 있는 법이니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리사이들을 얼마나 비난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하고 말한다.” (마태 11,18-19)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명성을 비방하는 조직적인 움직임에 고통받으셨습니다. 그분의 흠잡을 데 없는 행동을 중상하고 욕하며 상처 입히는 비난들이 쏟아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성적인 결함을 가졌고 개인적으로도 실수를 저지르지만, 자신의 그런 단점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스승으로 따르려 합니다. 그들이 지닌 인간적 나약함이란 워낙 흔하고 피할 수 없는 것들이지요.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마저도 예수님과 똑같이 비난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한계를 알고 있다고 해서 누군가의 명성을 해코지하는 죄와 불의가 용납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비록 그런 말을 지어내는 사람들은 그저 “이상한데”라고 큰 소리로 말하며 자신들의 행적을 지우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마태 10,25)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또한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마태 5,22)

이렇게 부당하게 남을 헐뜯는 태도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어떤 사람들은 마치 ‘시선을 왜곡하는 안경’을 쓰고 있는 듯합니다. 원론적으로 볼 때, 이런 사람들은 도덕적인 삶의 가능성을 거부하거나, 최소한 옳은 일을 하려는 끊임없는 노력들을 부정합니다.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은 미리 왜곡해버린 모습들로 얼룩져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가장 고귀하고 이타적인 행동들조차 단지 착하게 보이려고 꾸며낸 위선적인 작태에 불과한 것입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들은 선한 일을 확실히 찾아냈을 때 그 일을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그 선한 일 안에 숨겨진 결점을 반드시 찾아낼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서 말입니다.”

사생활의 권리 

예수님께서 눈먼 남자를 치료해주시는 장면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대답하십니다. 눈먼 남자의 불행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이 그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놀랍도록 간단하게 눈먼 남자에게 빛을 되찾아 주시기로 결심하십니다.

그로 인해 불쌍한 남자에게 행복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고뇌도 함께 시작됐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이웃 사람들이, 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요한 9,8) 그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복음서는 그들이 눈을 뜬 남자를 괴롭히면서 기뻐했다고까지는 전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까지 눈이 멀었던 그 남자는 자신이 이전에는 볼 수 없었으나 지금은 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눈을 뜬 남자가 새로 맞이한 행운을 평화롭게 즐기도록 놔두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를 바리사이들에게 데려갔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냐고 캐물었지요. 그러자 그 남자는 다시 한번 대답했습니다.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요한 9,15) 그러자 바리사이들은 그 남자에게 일어난 이 명백한 은총의 기적이 아예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라고 우기려 했습니다. 그러나 허사였지요. 그들 중 몇몇은 옹졸하고 위선적이며 비논리적인 주장을 폈습니다. 그 남자가 안식일에 치유되었다고 트집을 잡은 거죠. 안식일에 일하는 것은 율법에 위배된다면서 이 경이로운 사건을 부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바리사이들은 오늘날 우리가 진상조사라고 부를 법한 일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우선 눈먼 남자의 부모들에게 접근합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요한 9,20-21) 남자의 부모는 그들의 권위가 두려워서 있는 그대로의 내용만을 기술적으로 대답합니다. “이 아이는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이를 먹었으니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요한 9,20-21)

눈먼 남자의 부모를 조사한 바리사이들은 이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고요? 안 믿겠다고 작정을 했으니까요. “그리하여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하고 말하였다.” (요한 9,20-21)

요한 성인의 기록을 보면, 부도덕한 자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전형적인 방법에 대해 단 몇 마디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존중받아야 할 기본적인 자연권을 훼손하는 방법 말입니다.

이런 식의 작태가 비단 과거에만 일어났던 일은 아니지요.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을 병적으로 파고드는 공격적인 호기심은 오늘날에도 여러 경우가 존재합니다. 현실에서 그 예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지요. 실제로 뭔가 잘못이 있다고 의심되는 경우에도, 아주 조금이라도 사생활이 침해되지 않도록 조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매우 주의 깊게, 절제해서 조사를 진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요구하는 것이 최소한의 정의입니다. ‘법에 어긋나지 않는 명확히 선한 행동’에 대해서 불건전한 호기심으로 이를 검증하려 들면 사건을 왜곡하게 됩니다. 이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선의(善意)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사람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사생활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모든 사람들의 존엄함을, 평화롭게 살아갈 그들의 권리를 지켜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모든 정직한 사람들은 이러한 권리 수호의 필요성에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가치가 위험해지기 때문입니다. 보편적인 가치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이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권리이며, 가족 안에서 희로애락을 누릴 권리입니다. 세상에 알리지 않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권리와, 순수한 사랑으로 가난한 이웃을 도울 수 있는 권리 역시 그런 보편적 가치에 포함됩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개인의 노력을 사방에 선전하지 않으며 이웃에 대한 봉사가 허용돼야 하는 것이지요. 분별없고 뒤틀린 자들의 눈에 우리의 내적 생활을 드러내지 않고도 그러한 봉사가 가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뒤틀린 시선을 가진 자들은 우리의 내적 생활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설령 관심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걸 빌미로 우리를 조롱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집요하게 남의 뒤를 캐는 자들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정말로 어렵습니다. 사람을 홀로 가만히 놔두지 않기 위해 고안된 방법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기술적인 방법뿐만 아니라, 제법 알려진 논쟁의 방식들까지 포함합니다. 너무 교묘해서 그에 대응하는 것만으로도 당사자의 명성이 위험에 빠지게 되는 그런 논쟁 말입니다. 그런 논쟁 중 흔한 방식을 예로 들자면, ‘모든 사람들은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한다’고 억지 추정을 하는 겁니다. 이런 그릇된 일련의 사고방식에 끌려가다 보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내 탓이요”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고 자기비판에 빠져들고 맙니다. 만약 우리가 먼저 자기비판을 하지 않는다면, 비난하는 자들은 지체 없이 나서서 우리가 교활한 악당일 뿐 아니라 위선적이고 거만하다고 떠들어댈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비난하는 과정이 다릅니다. 상대방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의도를 가진 작가나 호사가들이 여러분을 개인적으로는 올바른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은 올바른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며, 당신을 두고 도둑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자신이 도둑이 아님을 증명하겠습니까?” 아니면,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죠. “여러분은 언제나 여러분의 행동이 깨끗하고 고귀하며 올바르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여러분의 행동이 더럽지 않고, 삐뚤어지지도 않고, 비열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조사를 해봐도 되겠습니까?”

성모님에 관한 복음 말씀은 그분이 당신 아드님을 한 걸음씩 착실하게 따라가셨던 예수님의 어머니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업에서 한 역할을 맡으시면서 그분과 함께 기뻐하고 아파하시는 어머니인 것입니다. 복음은, 성모님에 대해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이들을 사랑하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어머니의 돌봄으로 살펴주시는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카나의 결혼잔치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성모님께서는 시끌벅적한 시골 결혼식 중 하나에 초대받은 하객이었습니다. 여러 다른 마을에서 온 군중으로 붐볐습니다. 하지만 오직 성모님만이 포도주가 동이 난 것을 알아차리셨죠.

그리스도의 삶에서 만나는 이런 장면들은 우리에게도 익숙해 보이지 않나요? 하느님의 위대하심은 이처럼 일상적인 일들에서 드러납니다. 여인이, 특히 가정주부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아차리고, 삶을 즐겁게 만드는 작은 일들을 살피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리고 성모 마리아께서는 이것을 행동에 옮기셨습니다.

카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를 전한 사람이 요한이란 점도 눈여겨봅시다. 요한은 우리를 걱정하시는 어머니 성모님의 이야기를 기록한 유일한 복음사가입니다. 요한 성인은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할 때 성모님이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길 바랐습니다. 오직 요한 성인만 이 사실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님을 누구에게 부탁할지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은 성모님을 자신의 어머니로 이해하고 사랑할 줄 알았던 제자였던 것입니다.

‘주님 승천’과 ‘성령 강림’ 사이의 날들로 돌아가 봅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온 승리의 결과로 제자들은 믿음이 충만해진 상태입니다. 그들은 간절하게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서로가 곁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마치 한 가족처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사도 1,14)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 가장 길게 얘기해주는 복음사가는 루카 성인입니다. 루카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는 데 성모 마리아께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의 시작에도 성모님이 깊이 관여하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려 했고, 그래서 그렇게 긴 설명을 한 듯합니다.

교회가 시작된 첫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갈구하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모님을 만났고 어머니와 같은 그분의 보살핌을 경험했습니다. 성모님은 진실로 그리스도인들의 어머니로 불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교회의 신자들이 생겨나는 데 협력하셨습니다. 그렇게 생겨난 교회의 신자들은 성모님이 육신의 실제적인 어머니이신 분, 즉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께 드리는 이러한 공경의 가장 오래된 증언들 중 하나가 다음과 같은 확신에 찬 기도라는 사실은 결코 놀랍지 않습니다. “천주의 성모여, 당신의 보호에 우리를 맡기오니, 어려울 때에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마시고, 항상 모든 위험에서 우리를 구하소서.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녀여.”

하느님 사랑 안에서 사람들 이끌기 

하지만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음 대신에 올곧은 영(靈)의 의지를 네게 주겠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조건 없이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인간의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따로 함께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제 부모와 친구들을 사랑하는 똑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성자 그리스도와 성부와 성령, 그리고 성모님을 사랑합니다. 그런 사랑을 아무리 반복해도 저는 질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면 결코 거룩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진실하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체험한 사랑이라면, 그런 인간의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는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1코린 15,28)” 때, 우리가 천국에서 나누게 될 사랑을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나날이 인정 많고 관대하며 헌신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을 반드시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배운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참으로 단순하게, 조금의 자만심도 없이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더불어 나눌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사회에서 직장 일을 하면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여러분의 직업을 진실한 봉사로 바꿔놓을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가능한 모든 기술적, 문화적 이점을 활용해 여러분이 하는 일이 잘 돼야 합니다. 그러면서 항상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기심이 아닌 관대함이 동기가 되고,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닌 모두의 복지를 지향한다면,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삶의 느낌으로 충만해져서 일을 한다면, 여러분이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고 인류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을 통해서, 인간관계의 모든 네트워크를 통해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내보여야 합니다. 또한 친교와 이해, 인간적인 애정과 평화를 위한 노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팔레스티나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신” (사도 10,38)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의 가족관계와 시민사회, 그리고 직장에서, 또한 여러분의 문화와 여가활동 중에서 ‘평화’를 전파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의 왕국이 여러분 마음에 이르렀다는 최고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성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1요한 3,14)

하지만 ‘예수 성심’이라고 하는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성심을 꼼꼼히 바라보고 묵상할 때에만, 우리의 마음이 증오와 무관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사가 루카 성인이 예수님께서 나인 고을에 가셨을 때를 묘사한 장면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치십니다. 그분은 그냥 지나쳐 가시거나 사람들이 당신을 부를 때까지 기다리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먼저 과부에게 가셨습니다. 과부의 슬픔에 마음이 움직이신 것입니다. 과부는 이제 막 자신의 모든 것인 아들을 잃었습니다.

루카 성인은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였다고 설명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라자로가 죽었던 때와 같은 기색을 보이셨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사랑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결코 무감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어린 자녀들이 부모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괴로워하십니다.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주시며,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은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우리가 먼저 인정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영감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군중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기적을 경외할 것이며 기적의 이야기를 온 지방에 퍼뜨릴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히 효과를 바라고 인위적으로 행동하는 분이 아닙니다. 간단히 말해,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고통에 마음이 움직였고, 그녀를 위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과부에게 다가가 “울지 마라” (루카 7,13) 하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이렇게 얘기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네가 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나는 기쁨과 평화를 주기 위해 지상에 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권능의 징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기적보다 당신의 연민이 먼저였습니다. 이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성심이 따뜻하다는 명백한 징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