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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예수 그리스도 → 그리스도인은 제2의 그리스도이다 항이 있음.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영롱한 가정의 몇몇 특징들에 관해서 이야기해보았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이런 특징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빛과 기쁨으로 가득한 가정입니다. 부모의 일치는 자녀들의 일치로, 모든 가족들의 일치로, 그리고 그들의 삶과 연관된 모든 사람들의 일치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참된 그리스도인 가정은 어떤 방식으로든, 하느님께서 선택하셔서 세상을 이끌도록 파견하신 교회의 신비를 재현합니다.

사제이건 평신도이건 기혼자이건 미혼이건 상관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온전히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성가정축일에 우리가 읽었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 (콜로 3,12) 이 말씀에 나오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수없이 실수를 저지르지만 그 실수를 극복하기 위해 분투하며, 자신이 처한 세속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들 한 명 한 명이 바로 그런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하느님께 선택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달은 기쁨을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전하도록 뽑힌 것입니다.

성직자의 강론이나 종교 수업, 또는 하느님께서 이 길을 따르도록 부르시고자 하는 사람들의 양심 성찰에서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결혼은 하느님의 진정한 부르심’이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그러니 부부들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완수하는 데 동참하기 위해 그들이 진정으로 부르심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사도 시대의 그리스도인 가정은 오늘날 그리스도인 부부들에게 최고의 본보기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의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였고, 그의 집에서 이방인들도 교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참조 사도 10,24-28) 아퀼라와 프리스킬라는 코린토와 에페소에서 바오로 사도와 협력해 선교하였으며(참조 사도 18,1-26), 자선과 선행을 많이 한 타비타는 야포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도왔습니다.(참조 사도 9,36) 유다인과 이방인들,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의 수많은 다른 가정들에서도 주님의 첫 사도들의 가르침이 결실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어 살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전하는 가정이 된 것입니다. 작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이 복음과 메시지를 세상에 널리 선포하는 중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그 시대의 다른 가정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리스도인 가정은 새로운 영성으로 살아가고, 그들과 관계 맺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를 전파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며, 우리도 그들처럼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화와 기쁨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위험한 안전(安全)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보호 속에 사는 이, 전능하신 분의 그늘에 머무는 이” (시편 91,1).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위험한 안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얘기를 경청하신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신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렇게 확신한다면 우리는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함께 나누려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께 다가간다면, 그것은 우리가 새로운 회개를 준비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정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감에 보다 주의 깊게 귀 기울이며,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영감이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하느님께서 불러일으키시는 거룩한 갈망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첫 번째 결정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참으로 따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결정한 이후,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이행해가는 여정에서 우리가 많이 성장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할 일이 여전히 많다는 게 사실이지 않습니까? 특히 우리 안에 여전히 너무도 많은 교만(驕慢)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실제로 다시 변화해야만 합니다. 더욱 성실하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은 줄어들고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커지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요한 3,30)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성인이 얘기한 새로운 목표를 향해 쉼 없이 전진해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20) 이것은 고귀하고 숭고한 바람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뜻하며 이것이 바로 거룩함인 것입니다. 만약 세례 때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 심어주신 거룩한 삶을 우리가 그대로 살고 싶다면,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우리는 거룩함을 키워가야 합니다. 이 거룩함을 꺼리고 피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삶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거부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불길은 계속 지펴져야 합니다. 그 사랑의 불길은 우리 영혼의 힘을 모아 매일 커져야 합니다. 불길은 무언가를 계속 태움으로써 유지됩니다. 만약 우리가 계속 불을 지피지 않는다면 꺼져버릴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얘기를 기억합시다. “만약 여러분이 스스로 ‘이만큼 왔으면 충분하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길을 잃은 것입니다. 더 멀리 나아가십시오. 계속 가십시오. 같은 장소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되돌아가지 마십시오. 길 밖으로 벗어나지 마십시오.”

사순시기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따르며 성장하고 있는가?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 성장하고 있는가? 일상에서 실천하는 너그러운 사도직 활동이 성장하고 있는가? 내 동료들과 함께하는 일상의 일에서 성장하고 있는가?

우리 모두 조용히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한번 변화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고, 우리 행동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분명히 비추어지려면, 우리가 변화해야만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2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 말씀을 다시 하고 계십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고 우리 귀에 속삭이시면서 말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박해 시기, 또는 순교의 기회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예전의 우리’를 부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지금의 우리’를 고백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행하고 생각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의 고백이 이뤄지도록 합시다.”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화답합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에페 5, 8-10)

회개는 한순간의 일이고 거룩해지는 것(聖化)은 평생의 과업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에 심어주신 사랑의 거룩한 씨앗은 자라나기를 원하고 행동으로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대로 한결같이 일치하는 열매를 맺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상황에서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처음 회개했던 순간의 그 빛과 강렬한 느낌을 되찾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며 양심의 깊은 성찰을 갖추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주님과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다시 회개하고자 한다면 다른 길은 없습니다.

끊임없는 투쟁 

그리스도인의 투쟁은 끊임없이 계속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내적 삶이란 끝없이 다시 시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투쟁은, 우리가 이미 완벽하다는 교만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우리를 막아줍니다. 우리네 삶의 여정에서 온갖 어려움과 마주하는 일은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장애물들에 직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과 피로 만들어진 피조물일 수 없을 것입니다. 즉, 우리가 살과 피로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런 장애물들과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를 주저앉히는 욕정과 만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파괴적인 충동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육(靈肉) 안에서 교만과 육욕, 시기와 나태, 그리고 남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의 바늘을 발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놀라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개개인의 경험을 통해 증명된 우리 삶의 실상입니다. 우리 안에서 그런 요인들을 발견하는 것이 아버지의 집으로 달려가는 이 은밀한 경기에서 이기는 출발점이자 정상적인 흐름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1코린 9,26-27)

이런 투쟁을 시작하거나 또는 계속해나가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외적 징표를 기다려선 안 됩니다. 내적으로 좋은 감정이 일어나길 기다려서도 안 됩니다. 내적 삶이란 감정이 아닌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 있으며, 기꺼이 스스로 하려는 의지와 사랑에 좌우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승리의 날에 모든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치욕의 순간에는 그들 중 거의 모두가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사랑을 하려면 강하고 성실해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심장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 굳건히 닻을 내려야 합니다. 변덕스럽고 피상적인 사람들만이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랑의 대상을 바꾸는 법입니다. 그렇게 쉽사리 바뀌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기심을 좇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랑이 있다면, 자신을 내어주고 희생하며 스스로를 포기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고통스러운 난관을 헤쳐가는 자기 부정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기쁨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무엇도, 어느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기쁨을 찾는 것입니다.

고해성사 안에서 회개하고 개선하겠다는 결심을 하며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그렇게 우리가 이 사랑의 모험을 하는 동안에는 스스로의 타락 때문에 낙담하지 맙시다. 그 타락의 정도가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풀이 죽어선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착한 행동의 기록만을 모으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수집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정직하고 충실한 요한에게 감동을 받으셨지만, 잘못을 저지른 뒤 뉘우친 베드로에게도 똑같이 감동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약점을 이해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끌어당겨 당신께 갈 수밖에 없도록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루하루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들을 만나시려고 엠마오로 직접 오신 것처럼 그분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분은 토마스를 찾아오셔서 자신을 보여주시고 당신의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를 그에게 만지도록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우리가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약점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께 접붙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견진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왕직과 예언직, 그리고 사제직을 더불어 나누며 세상 안에서 활동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일치와 사랑의 성사인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인 동시에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똑같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서로를, 자기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참으로 온 인류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란 사실을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신앙은 그분이 우리의 구세주임을 보여주고, 우리 자신을 그분과 하나가 되도록 이끌어 주며 그분이 하셨던 대로 우리도 행동하게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시면서 그를 의심의 덫에서 자유롭게 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29) 이에 대해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우리에 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육신을 본 적이 없지만, 영적으로 당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행동이 신앙과 일치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신이 믿은 바를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면 진실로 믿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오 성인은 말로만 신앙을 가졌다면서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얘기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안다고 주장하지만 행동으로는 그분을 부정합니다. (티토 1,16)’”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란 사실과, 구세주로서 당신의 역할을 결코 따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 (1티모 2,4)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개인적 약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제2의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 자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역시 모든 인류를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수 세기에 걸쳐 새롭게 거듭되어온 당신의 계명을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요한 성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온 옛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여러분이 들은 그 말씀입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도 또 여러분에게도 참된 사실입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이미 참 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 걸림돌이 없습니다.” (1요한 2,7-10)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와 기쁜 소식, 그리고 생명을 가져다주셨습니다. 부자이거나 가난한 사람이거나, 현명한 사람이거나 단순한 사람이거나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형제들에게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고, 같은 아버지인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민족만 존재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 민족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피부색만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 하나의 피부색 말입니다. 또한 오직 하나의 언어만 존재합니다. 말들이 일으키는 소음이 없는, 오직 마음과 마음이 서로 얘기하는 언어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알게 하고 서로 사랑하게 하는 언어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묵상 

우리들 각자의 삶에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자신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 삶의 영성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 삶의 상세한 부분들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상세한 부분들을 통해 그분의 마음가짐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특별히 그분의 삶을 관상(觀想)함으로써 굳셈(힘)과 빛과 고요와 평화를 얻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과 같아지기 위해서 그의 삶과 성향을 모두 알고 싶어 합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그분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을 때부터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까지 예수님의 삶을 온전히 묵상해야만 합니다. 저는 사제생활 초기에 예수님의 삶에 관한 책들과 복음서의 복사본을 신자들에게 선물하곤 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의 삶에 관해서 알아야 하며, 그분의 삶을 우리 마음 깊이 새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책이 없더라도 눈을 감고 그분의 삶을 마치 영화를 보듯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네 삶의 모든 다양한 상황에서 주님의 말씀과 행동이 우리 마음에 떠오를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삶에 함께하게 됩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분 삶의 몇몇 장면들을 떠올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온전히 그분의 삶에 함께해야 하고, 예수님의 삶에서 일익을 담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당신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그랬던 것처럼, 그분의 첫 열두 사도들과 거룩한 여인들, 그리고 그분께 간청했던 군중들처럼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망설이지 않고 그분을 따른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영혼에 깊이 들어와 진실로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기” (히브 4,12)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 데려가고 싶다면, 먼저 복음을 읽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해야 합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수난당하시는 핵심 사건들을 선택해 묵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3) 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수난 이외의 그분의 삶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고, 아울러 그분이 매일 만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자세히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당신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완벽한 하느님이시고 동시에 완벽한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인간적이면서도 거룩하게 행동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위치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죄를 제외하고 우리 인간의 본성을 온전하게 취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돌보심 안에 있습니다. 단순히 기능적 범주에만 우리들 자신을 국한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돌보심에 관해 신학적으로 살펴봅시다. 그렇게 살펴보면, 세상에는 오직 세속적인 것들만 존재한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선함이나 고귀함, 또는 공평함 같은 것들이 그 예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인간의 자녀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그분은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고, 당신 손으로 직접 일하셨으며, 친교와 순명과 고통과 죽음을 체험하셨습니다. 그러니 세상 모든 것들을 세속적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콜로 1,19-20)

우리는 세상과 그 안에서 하는 일들과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좋은 것이니까요. 아담의 죄가 하느님께서 주신 창조의 균형을 깨버렸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평화를 다시 세우기 위해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로 인해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된 우리들은 당신의 창조 질서를 무질서 상태에서 해방시키고, 모든 것들을 하느님과 화해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개개의 인간이 처한 상황은 모두 특별합니다. 그들이 저마다 특별한 소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자신이 받은 소명을 열정적으로 살아냄으로써 ‘그리스도의 영성’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으며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들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일치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이 일을 해낼 것입니다.

빵과 말씀 안에 계신 그리스도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하는 법을 배워서 그분을 분명하게 알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영육 간에 예수님께 매우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우리에게 오시는 길을 명확히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성체의 양식을 받아먹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가르침을 알고 실천함으로써 생명의 빵 안에서, 그리고 말씀 안에서 그분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 안에서 그분을 만나 친교를 맺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요한 6,55-56)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요한 14,21)

이 말씀은 결코 단순한 약속이 아닙니다. 참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며, 진실된 삶의 정수입니다.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이고도 직접적으로 하느님과 친교를 맺게 해주는 은총의 삶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요한 15,10)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승천의 날을 알리는 최상의 예고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가셔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승천 직후에 새로운 하느님의 사랑이 강림하셔서 신비한 방법으로 복되신 삼위일체의 제3위격이신 성령의 현존(現存)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요한 16,7)

예수님은 가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고 거룩하게 해주십니다.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활동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 그리스도의 선언을 확인하게 해줍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로마 8,15)

아시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복되신 삼위일체의 활동인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생명의 빵 안에서, 말씀 안에서, 성체와 기도 안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해주시는 은총에 화답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인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시는 분이니까요. 교회는, 빵이 실제로 살아계심을 매일매일 우리가 기억하게 합니다. 그리고 전례력상의 또 다른 이틀, 즉 ‘성목요일’과 ‘성체 성혈 대축일’을 기념하여 중요한 축일로 제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에 우리는 주님과 대화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읍시다.

사도직 : 우리 주님과 함께하는 구원사업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묵상하는 영혼은 사도적 열정으로 충만해집니다. “내 마음이 속에서 달아올랐고, 내 생각에 활활 불이 타올랐다.” (시편 39,4) 이 ‘불’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불’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 12,49) 이것이 바로 기도를 통해 힘을 얻는 사도적 열정의 불길인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된 ‘평화를 위한 전투’라는 소명을 이루기 위해 기도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부르심을 받은 ‘평화를 위한 전투’란 그리스도의 고통을 더욱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채워나가기 위해 세상 모든 곳에서 펼쳐지는 분투를 뜻합니다.

우리가 본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열두 사도들이 그분과 친교를 맺은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기도와 성체 안에서 예수님과 친교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도적 열정에 불타오를 수 있습니다. 사도적 열정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봉사하게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구원하게 하고, 그가 어디를 가든지 평화와 기쁨의 씨앗을 뿌리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봉사’는 사도직의 모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에만 기댄다면, 우리는 초자연적 차원에서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도구가 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필리 4,13) 한없이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적당하지 않은 도구를 쓰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에게 다른 목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사도 안에 오셔서 사도를 통하여 일하시도록 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표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신을 온전히 내맡김으로써 한 피조물을 통해, 즉 당신께서 선택하신 영혼을 통해 주님의 구원사업을 이루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 명의 사도, 그가 곧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세례를 통해서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접붙여지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견진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음을 알게 됩니다. 견진성사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서의 활동으로 하느님을 섬기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들이 가진 보편 사제직입니다. 이 보편 사제직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어느 정도 더불어 나누도록 합니다. 보편 사제직은 사제가 지닌 직무 사제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교회의 흠숭지례에 참여하는 자격을 부여합니다. 또한 기도와 보속을 통해 말과 모범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도록 도울 수 있는 자격을 얻게 합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 자신 (Ipse Christus)’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주신 중재자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봉헌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한가운데서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자신만이 거룩하게 되기 위해 노력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길로 나아가, 그 길들이 모든 장애물을 넘어 인간의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는 길이 되도록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평범한 시민으로서 모든 세속적 활동에 참여할 때 우리는 밀가루 반죽을 변화시키는 누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순수하게 인간적인 모든 존재들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이 사실을 독특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오셨던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분이 머물던 곳인 지상으로부터 천국으로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승천하시던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하나로 합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에 우리는 장엄하게 선언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선고된 판결이 거두어졌고, 우리를 타락하게 한 결정들이 취소됐다고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라는 말씀을 들은 바로 그 인간의 본성(本性)이 오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 세상이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말씀을 여러분께 반복해서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겐 세상을 성화(聖化)하기 위해 수행해야 할 특별한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류가 세상을 더럽힌 죄의 정황(情況)들을 씻어내 이 세상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봉헌으로 이 세상을 우리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이 세상을 주님께 드리려면, 당신의 은총과 우리의 노력을 통해 그분께서 받으실만한 세상이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모든 인간 존재는 초자연적인 중요성을 지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이 완벽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으며, 당신의 현존과 당신께서 직접 하신 일들로 이 세상을 축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례 때 우리가 받은 위대한 소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영혼을 구원해야 하는 이 과업을 우리 어깨 위에 나누어 짊어지도록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 

우리 모두 살아가면서 숱한 상황들과 마주합니다. 그 상황이란 개인적 생존의 여건일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역사의 엄청난 기로일 때도 있지요. 저는 삶의 그런 모든 상황들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수많은 부르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진실을 마주 보게 하기 위한 부르심 말입니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기회라고 여깁니다. 당신의 은총으로 굳세어진 우리의 행동과 말을 통해 우리가 속해 있는 그분, 성령을 선포하는 기회인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세대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구원하고 거룩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이해하고 똑같이 함께 나눠야 합니다. 우리는 말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으로부터 오는 값진 보물의 영원한 솟구침에 화답하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이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구하면서도 항상 새로운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복음 선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속해 있고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세상을 향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인간 존재와 운명에 관해 가르치는 것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관해 대다수 사람들이 무관심한 것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우리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세속의 일들에만 관심이 있으며 천국을 우러러보는 것을 아예 잊어버렸다고 여긴다면, 그 역시 사실과 다릅니다. 물론 편협한 이념들과, 그런 이념들을 견지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차고 넘친다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대에 엄청난 욕망과 비도덕적인 태도, 영웅주의와 비겁함, 열성과 환멸을 동시에 발견합니다. 더 정의롭고 인간적인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아마도 젊은 시절에 이상주의가 좌절됨으로 인해서 용기를 잃어버린 듯한 사람들을 동시에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용기를 잃은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하거나 아니면 스스로의 좌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이기주의에 갇혀 자신을 숨기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신앙을 가져야 하고, 또한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인간적 계산에 의해서도 결코 멈춰선 안 됩니다.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이겨내기 위해 주님이 주신 과업에 우리 스스로를 투신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노력이 새로운 길을 열어갈 것입니다. 하느님께 헌신하는 우리들 각자의 거룩함이야말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단 하나의 해결책입니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려운 일이라고 여러분은 얘기할 겁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이상적인 것은 항상 수준이 높은 법이니까요. 하지만 딱히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플 때 딱 들어맞는 약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일의 경우엔 그렇지 않습니다. 특효약이 항상 있는 법입니다. 그 특효약은 바로 거룩한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당신이 제정하신 다른 성사들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말과 행동으로 다시 말해봅시다. “주님,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만나는 당신의 섭리와 매일 주시는 당신의 도움이 제가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엄청난 기적을 일으켜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키워달라고 부탁해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을 밝혀주시고 우리의 의지를 굳세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무르십니다. 바로 그분께서 항상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강론을 시작한 이후로 항상 신자들께 주의를 드린 것이 있습니다. 거룩함에 대한 잘못된 느낌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실제로 알게 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맞습니다. 여러분은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이나 저나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거룩하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영원무궁하신 분의 거룩한 부르심으로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에페 1,4) 우리는 특별히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들 개개인의 엄청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느님의 도구들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나약함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쓰임새가 큰 주님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닥쳐오는 유혹들은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알게 해주는 척도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생생하게 체험했기 때문에 낙담한다면, 그 순간이야말로 온전히, 그리고 순명하며 하느님 손길에 스스로를 내어드릴 때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을 만나 자선을 청했던 어떤 걸인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걸인 앞에 멈춰 서서 그에게 다섯 도시의 지배권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걸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뒷걸음질 쳤습니다. 그리고 소릴 질렀죠. “저는 그렇게 어마어마한 것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대왕이 대답했습니다. “너는 꼭 너답게 내게 청했고, 나는 꼭 나답게 네게 주는 것이다.”

우리들 자신의 한계를 명확하게 깨닫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당신의 생명을 우리가 더불어 나눌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뒤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 편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실하고, 또한 충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직시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이해하고 우리들 자신의 잘못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사랑과 자극을 예수님 안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여러분과 나 그리고 우리 모두가 느끼는 좌절감마저도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는 하나의 기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허약함을 인정합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권능에 고백합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희망과 기쁨,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도구로 쓰길 원하신다는 강한 확신으로 일관돼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교회의 한 부분으로 여긴다면, 그리고 베드로라는 반석과 성령의 활동으로 우리 자신을 지탱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살아가는 모든 순간의 작은 의무들을 완수하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조금씩 씨를 뿌리면 우리의 곡식 창고는 넘쳐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