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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예수 그리스도 → 제자들을 대하시는 주님 항이 있음.

사도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함께 얘기해온 것들에 관해 기록한 선례들을 생각할 때마다 크게 고무됩니다. 첫 열두 제자를 부르신 복음서의 기록에서 차근차근 그 내용을 짚어봅시다. 그리고 천천히 묵상합시다. 우리 주님의 거룩한 증인들에게,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도와달라고 간청합시다.

제가 매우 좋아하고 공경하는 첫 사도들은 인간적으로는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오를 제외하면 사도들은 그저 그런 어부들에 불과했습니다. 세리였던 마태오만은 아마도 어렵지 않은 생활을 했겠지만, 그마저도 예수님 말씀을 듣고는 모두 버렸습니다. 나머지 사도들은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아야만 근근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곤궁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지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초자연적인 일들에 대한 그들의 반응으로 미루어봤을 때, 그다지 영민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가장 기초적인 예시와 비유들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스승이신 예수님께 다가가 ‘그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주십시오.’(마태 15,15) 하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 관해 얘기하며 ‘누룩’의 비유를 사용하셨을 때 사도들은 자기들이 빵을 사오지 않은 것에 대해 나무라시는 걸로 잘못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사도들은 가난하고 무지했습니다. 그들은 그리 단순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야심까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종, 그들 생각에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우실 것이며, 그때 자신들 가운데 누가 가장 높은 자가 될지 논쟁했습니다. 심지어 최후의 만찬의 그 친밀한 분위기에서도,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스스로 죽으시려는 그 숭고한 순간에서 조차도 그들은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신앙이요? 그들은 거의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점을 지적하셨지요. 그들은 죽은 자가 일어나고, 온갖 질병이 치유되고, 빵과 물고기가 불어나고, 폭풍우가 잠잠해지고, 마귀가 내쫓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즉시 반응한 사람은 사도들의 지도자 역할로 선택된 베드로 성인뿐이었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 16, 15) 하지만 베드로의 신앙은 자신의 한계에 매몰된 믿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고난받고 죽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을 반박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나무라셔야만 했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태 16,23) 이와 관해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너무나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존엄하신 주님께 맞지 않으며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베드로를 나무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고통은 나의 존엄에 걸맞는 일이며 내가 당해야 할 일이다. 나의 존엄과 나의 위신(威信)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네 마음이 인간의 사고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신앙심 얕은 사람들이 적어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만은 남달랐을까요? 그들은 말로는 분명히 그분을 사랑했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열정에 휩싸여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요한 11,16)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그 진실의 순간에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도망쳤습니다. 사도들 중 막내였던 소년 요한만이 진정한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주님께서 매달리신 십자가 곁에는 오직 요한만 눈에 띄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죽음만큼 강한 사랑을 자기 안에서 찾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 사람들은 모두 우리 주님께서 부르신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져 “교회의 기둥”이 되기 전까지 (갈라 2,9) 제자들은 여전히 그러한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점과 단점을 지닌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행동보다는 말이 앞서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마태 4,19), 구원사업의 협조자이자 하느님의 은총을 나눠주는 이들이 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일어난 다른 여러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숨겨진 시간들을 묵상할 때도 우리는 언제나 감동하게 됩니다. 이 30년의 시간은 우리의 이기심과 나태함을 털어내라는 부르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한계와,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마음과, 우리의 욕망을 알고 계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스스로를 내어주는 것이 인간에겐 참으로 어려운 일이란 사실을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또한 사랑을 찾을 수 없을 때의 심정이 어떤지, 입으로는 주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반쯤 무관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 그 기분이 어떤지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복음사가들이 묘사한 인상적인 장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세속적인 욕망에 가득 차고 오직 인간적인 계획에만 몰두하는 사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도들을 가까이에 두시고 당신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을 그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이 우리를 부르시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물으 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묻습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마태 20,22) 여기서 ‘잔’이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여러분 자신을 바칠 수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그때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습니다.(Possumus!). 우리는 준비돼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그럴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모든 일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의 온 마음을 주님께 드렸던가요? 아니면 하느님이 아닌 우리들 자신에 얽매이고, 우리의 이익과 편안함, 그리고 자기애에만 집착하고 있나요? 우리 생활 속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요? 우리의 길을 그리스도인답게 바꾸는 것을 꺼리게 만드는 무엇이 있는 겁니까? 다행히 이 모든 것을 올곧게 바로잡을 기회가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이 질문들을 우리에게 개별적으로 주셨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질문을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인 것입니다. 저는 감히 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큰 소리로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각자 마음속으로 조용히 우리 주님께 고백하십시오. “주님, 제가 얼마나 쓸모없는 인간인지요, 얼마나 겁쟁이인지요! 얼마나 많은 실수를 거듭해왔는지요.” 그러고 나서야 조금 더 나아가 주님께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뭐 괜찮습니다. 주님, 당신의 손길로 저를 지켜주고 계시니까요. 만약 저를 그냥 내버려두신다면 저는 정말로 최악의 수치스러운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저를 내버려두지 마세요. 어린아이처럼 저를 보살펴 주십시오. 저는 강하고 용감해지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저를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저는 보잘것없는 피조물입니다. 주님, 제 손을 잡아 이끌어 주십시오. 당신의 성모님께서 항상 제 곁에서 지켜주시도록 해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면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possumus!)! 당신을 우리의 본보기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결코 주제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거룩한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우리가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인간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그 거룩한 길을 인간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길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그렇게 낮추신 이유입니다. “그분이 당신 자신을 그리도 낮추셔서 종의 모습을 취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 주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존재셨지만, 자신의 위엄과 권능을 스스로 낮추셨습니다. 그러나 선함과 자비는 그대로이셨습니다.”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그 거룩한 길을 우리가 쉽게 갈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초대를 거부하지 맙시다. 그분께 “아니요.”라고 말하지 맙시다. 그분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하지 맙시다. 핑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지 못할 거라고 더 이상 생각하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범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온 마음을 다해 여러 형제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귀중한 본보기를 무시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예수님을 따르고 성령 안에서 여러분의 영혼을 새롭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일을 거룩하게 만드십시오. 그러면 여러분과 다른 사람들이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제 삶을 모두 바친 ‘오푸스데이’의 영성을 설명하면서, 저는 오푸스데이의 영성이 세상 한가운데서 수행하는 우리의 평범한 노동과 직업적인 일들에 전적으로 달려있다고 말해왔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우리에게 사명을 부여합니다. 그 사명은 교회의 특별한 임무를 함께 나누고, 우리 동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함으로써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이끌어가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부르심은 우리들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 보입니다. 이는 곧 믿음을 통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이유를 확신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우리 삶은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넓이와 깊이를 획득합니다. 지나간 모든 일과 사건들이 진실한 시선으로 다시 조명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하면서 우리 자신이 새로 태어나는 것을 실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무지의 그림자로부터 끌어내셨습니다. 인류의 역사 내내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맸던 방황의 그림자로부터 우리를 빠져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진 우리의 직업이 무엇이건 간에 하느님께서는 힘찬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예전에 부르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마태 4,19).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어려움을 겪고 악전고투하며, 고통을 당하고, 심지어 비탄에 젖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으로 사는 사람은 의기소침해지거나 번민에 빠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삶이 충분히 살 가치가 있으며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한 8,12)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 빛을 받을 자격을 갖추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충분히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베드로처럼 이야기해야 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요한 6, 68-69) 우리가 진정 이렇게 베드로처럼 말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어둠 속을 걷지 않는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깊이 들어오도록 했으니 말입니다. 왜냐하면 폭풍우 위에서 태양이 빛나듯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빛이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들 각자의 결점을 비춰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진 완전한 인간이 되고자 하셨음을 깨닫고 저는 매우 행복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묵상할 때에 저는 감동합니다.

열 두 제자들과의 관계를 시작으로 복음서에 기록된 몇 가지 사건들을 꼽아봅시다.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했던 사도 요한 성인은 그리스도와 이야기 나눴던 잊을 수 없는 첫 대화를 이렇게 썼습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 1,38-39)

이 거룩하면서도 인간적인 대화는 요한과 안드레아,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다른 제자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그로 인해 제자들의 마음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강가에서 그들에게 주신 권위 있는 가르침을 들을 준비가 돼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 4,18-20)

그 후 3년 동안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과 함께 삶을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알게 되셨고, 그들의 질문에 답하시고, 그들의 의심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라삐’이시며,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스승이시며, 동시에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분 또한 제자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가시는데 제자들이 그분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응시하면서 그분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으려고 애쓰고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이 돌아오셨을 때 제자들 중 한 명이 말했습니다. “‘주님,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를 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루카 11,1-2)

첫 번째 파견에서 돌아왔을 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행한 첫 임무의 결실에 놀라워하며 사도직 활동의 즉각적인 결과를 예수님께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같은 방법으로 하느님의 권위와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애정으로 사도들을 만나셨습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 6,31)

예수님의 승천 직전, 지상에서의 삶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요한 21,4-5)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어느 누구나 물었을 질문을 건네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분은 하느님으로서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 (요한 21, 6-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물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 쉰 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요한 21,4-13)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고귀하면서도 깊은 애정이 담긴 모습을 제자들이라는 작은 집단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거룩한 여인들에게도, 니코데모와 같은 산헤드린의 대표들에게도, 자캐오 같은 세리에게도, 그리고 병자들과 건강한 이들에게도, 율법학자와 이교도들에게도, 개인에게도, 군중에게도 똑같이 보여주셨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머리를 뉘어 쉴 곳도 없었다고 전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분에게 가깝고 좋은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들은 항상 예수님이 가까이 계실 때면 그분을 자기 집에 모시고자 소망했습니다. 또한 복음서는 병든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연민과, 무시 받거나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바라보시는 당신의 슬픔, 위선과 마주하실 때 내보이시는 그분의 화를 전해줍니다. 예컨대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 때문에 슬피 우셨습니다. 복음서는 또한 성전을 모독하는 환전업자들에 대한 당신의 분노와 나임 마을에 사는 과부의 슬픔에 움직이신 주님의 마음을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