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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예수 그리스도 → 나사렛의 가정 항이 있음.

성탄절에 우리는 성자(聖子)의 탄생을 둘러싼 여러 사건과 상황들을 생각합니다. 베들레헴의 마구간이나 나자렛의 성가정을 묵상하면, 성모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어린 예수님이 우리 마음 깊이 특별히 자리하게 됩니다. 이 소박하고도 경이로운 성가정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나요?

이 물음과 관련해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그 중 하나에 관해 특별히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탄생은 “때가 차자” 시작된 일을 의미합니다. (갈라 4,4). 이는 곧 하느님께서 인류를 향한 사랑을 펼쳐보이기 위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에게 보내시기로 선택하신 순간을 뜻합니다. 그런 하느님의 뜻은 가장 소박하면서도 평범한 환경에서 이뤄졌습니다. 생명을 출산하는 여인과 가족, 가정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환경 말입니다. 이런 평범한 것들로 이뤄진 인간적 현실(現實)을 통해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이를 깨달은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평범한 인간적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선한 것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무리 사소하고 평범하게 보이는 것일지라도, 그리스도와 만날 수 없는 인간적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적 상황이 하느님 나라로 향해가는 우리들 여정의 한 걸음인 것입니다.

참으로 소박한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묵상할 때마다 교회가 기쁨에 넘치는 것은 실로 당연합니다. 성가정 축일의 아침기도 찬송을 우리 함께 읽어봅시다. “우리는 기뻐하며 나자렛의 가난한 집과 그 빈약한 형편을 떠올립니다. 예수님의 숨겨진 삶을 노래로 다시 이야기하니 또한 기쁩니다. 예수님은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자라나셨고, 요셉이 하는 소박한 일을 배우셨습니다. 자애로운 어머니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곁에 앉으십니다. 또한 좋은 아내로 남편 곁에 계십니다. 피곤한 아들과 남편을 당신 사랑으로 위로해주시며 성모님은 만족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떠올릴 때면, 저는 빛과 기쁨으로 가득한 집을 즐겨 상상합니다. 주님의 성가정에 가득했던 바로 그 빛과 기쁨이 넘치는 집 말입니다. 성탄 메시지는 진정 힘차게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14). 또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콜로 3,15)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진실을 알게 될 때 평화가 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에게 평화가 찾아옵니다. 동정 성모님의 보호하심과 요셉 성인의 도우심으로 얻게 되는 평화인 것입니다. 평화는 우리네 삶을 밝게 비춰주는 위대한 빛입니다. 거듭되는 고난 속에서도, 우리들 각자의 실패 속에서도 평화의 빛은 우리가 계속 노력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줍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평화와 화목의 공간이어야만 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소소한 실패들과 마주치더라도, 우리의 가정은 심오하고도 진실한 사랑의 기운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온 가정에 평온(平溫)이 깊이 뿌리내려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참된 신앙을 실천할 때만 얻을 수 있는 결실입니다.

요셉과 예수님과의 관계 

저는 얼마 전부터 요셉 성인께 바치는 감동적인 기도문으로 즐겨 기도드려 왔습니다. 미사를 준비하는 기도문으로 교회가 우리에게 권고한 것입니다. “은총 받으신 행복한 성 요셉이시여, 당신은 하느님을 뵙고 그분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허락받으신 분입니다. 수많은 왕들이 그토록 하느님을 뵙고 싶어 했고 목소리를 듣길 원했지만, 헛수고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인께서는 그분을 뵙고 목소리를 들을 뿐 아니라, 당신 품에 하느님을 안고, 그분께 입맞추며, 옷을 입히고 돌보십니다. 성 요셉이시여. 저희를 위해 기도하소서.” 이 기도문은 오늘 제가 얘기하고 싶은 마지막 주제의 시작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 제가 끝으로 말씀드릴 주제는 요셉 성인이 예수님을 대하는 사랑 가득한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요셉 성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삶은 자신의 성소를 끊임없이 발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서로 상반된 상황들로 가득했던 요셉 성인의 초기 체험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영광과 이집트로의 탈출이 이어졌고, 동방박사들이 찾아온 장엄한 순간과 가난하고 미천한 구유가 공존했습니다. 천사들은 노래했지만 인류는 침묵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 요셉은 제물로 바칠 비둘기 한 쌍을 가져갔습니다. 요셉은 시메온과 한나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선포하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루카 2, 33) 라고 루카 성인은 기록했습니다. 그 후에 12살 소년이 된 예수님이 예루살렘 축제에 갔다가 성모 마리아와 요셉 성인 모르게 혼자 예루살렘에 남았고, 마리아와 요셉은 사흘 동안 찾아다닌 끝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부모는 무척 놀랐다.” (루카 2, 48) 라고 복음사가 루카는 우리에게 전합니다.

요셉 성인은 정말로 놀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서서히 당신의 계획을 그에게 드러내셨고, 요셉 성인은 그분의 계획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따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알게 됩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으며 의심을 가질 여지 또한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요셉 성인도 곧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수준에 올라섰다고 해서 그 상태에 그냥 머무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스스로의 성취에 안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더 많이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의 길은 인간의 길과 같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은 그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하느님의 경이로움을 깨달을 수 있도록 마음과 정신이 항상 깨어 있는 법을 예수님께 배웠습니다.

요셉 성인이 예수님으로부터 거룩하게 사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면, 인간적으로는 요셉 성인이 하느님의 아들을 가르친 것도 많았을 거라고 저는 감히 얘기하겠습니다. 요셉 성인에게 이따금씩 주어지는 ‘양아버지’라는 호칭을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호칭이 요셉 성인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어쩐지 차갑고 형식적인 것처럼 여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육신적으로 요셉 성인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육신의 부자 관계가 부성(父性)의 유일한 특성이 아님을 가르쳐 줍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한 강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란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넘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성인은 어땠을까요? 그의 부성(父性)이 정결하였던 것만큼이나 성인은 아버지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인이 다른 아버지들과 똑같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사랑의 결실이 아닌, 육신으로 아들을 가진 다른 아버지들과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요. 그랬기 때문에 루카 성인은 “사람들이 그를 예수님의 아버지로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왜 루카 성인은 ‘사람들이 생각했다’고만 얘기할까요? 요셉이 예수님의 아버지라는 생각과 그러한 인간적 판단이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일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요셉이 낳은 자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셉의 깊은 신심과 사랑이 있었기에 그에게 아들이 생긴 것입니다. 태어나신 그 아기는 동정 마리아의 아드님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친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듯 예수님을 사랑했고,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들을 아들에게 줌으로써 그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하느님께서 명하신 대로 아이를 돌봤으며, 자기의 전문 기술을 전수해 예수님을 장인(匠人)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자렛의 이웃사람들이 예수님을 ‘장인(匠人-목수)이자, 장인의 아들’이라고 부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셉 성인의 작업장에서, 요셉 성인의 곁에서 일했습니다. 요셉 성인은 어떤 분이어야 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왜 요셉 성인을 통해서 이 세상에 그토록 큰 은총을 주셨을까요?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아들을 인간적으로 양육하는 사명을 어떻게 완수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요셉 성인을 닮으셨을 것입니다. 일하는 방식, 성품과 말투를 닮았을 것입니다. 예수님 특유의 현실주의와 세세한 것들에 대한 섬세한 시선, 식탁에 앉아 빵을 떼어 나누는 방법, 그리고 가르침을 주실 때 일상적이고 사실적인 상황을 주로 활용하는 것까지.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요셉 성인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이스라엘 어느 특정 지역의 말투를 쓰고, 요셉이라 불리는 목수와 닮은 그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장엄한 신비를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누가 하느님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참으로 인간이셨고 평범한 삶을 사셨습니다. 무엇보다 어린아이로, 그런 다음에는 소년으로 요셉의 작업장에서 일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성인이 되어서 삶의 절정기를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루카 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