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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예수 그리스도 → 성탄과 나자렛 생활 항이 있음.

“이날 빛이 우리를 비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선언(宣言)입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에 감동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온 인류에게 선포됐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여기’에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계신다는 이 진리가 우리의 모든 삶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탄은 우리에게 새롭고도 특별한 하느님과의 만남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빛과 은총을 우리네 영혼 깊숙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성모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그 아기’ 앞에 멈춰 섭니다. ‘그 아기’는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1951년 8월 15일에 아주 특별한 이유로 이탈리아 로레토에 있는 ‘성가정 성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조용하고 경건하게 미사를 집전하고 싶었죠. 하지만 저는 그곳의 수많은 신자들의 열정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성모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이 깊었던 그곳의 신자들이 ‘성모 승천 대축일’에 엄청난 인파로 모일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교회법적으로는 그곳 신자들의 신심을 표현하는 방법이 적절하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전례법규에 따라 제대에 입을 맞추려 했을 때 그곳 여성 신자들 서너 명도 저와 똑같이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주의가 산만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확실히 감동적이기도 했습니다. 전승(傳承)에 따르면, 로레토의 ‘성가정’은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의 집이었다고 합니다. 그 가정집의 제대 위에는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요한 1,14) 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눈여겨보았습니다.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의 한 작은 모퉁이에, 사람이 지은 집에서 하느님께서 살고 계셨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 오셨는가? 

저는 성탄절 구유 옆에서 강론을 할 때마다 포대기에 쌓인 채 구유 속 지푸라기 위에 누워 있는 아기를 우리 주님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아무 말도 못하는 아기지만, 저는 이 아기를 나의 주인님이라고 여깁니다. 또한 이 아기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저는 이 아기를 스승님으로 바라봅니다. 이 아기로부터 배우기 위해서 여러분도 그의 삶을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상에서 지내신 그분 삶의 거룩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복음서를 읽고 신약성경의 장면(행적)들을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재현(再現)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지금 우리가 구유 앞에서 기도하듯이 그렇게 기도함으로써 그분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을 공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분이 갓 태어난 아기였을 때, 이 축복 받은 인간의 땅에서 처음 눈을 뜨셨던 그 순간부터 시작됐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과 똑같이 성장하고 생활하셨다는 사실은, 인간의 존재와 인류의 모든 일상 활동이 하나같이 거룩한 의미를 갖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굳이 이 모든 것에 대해 깊이 성찰하지 않더라도, 예수님 삶의 숨겨진 30년 세월을 생각하면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 30년 동안 그분께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과 더불어 생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사셨지만, 그 시기야말로 우리에게는 빛으로 가득한 시간인 것입니다. 그 30년의 세월은 우리네 인생을 비춰주고 삶을 의미로 가득 채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함께 생활하셨던 그때의 사람들처럼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똑같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30년 동안 ‘목수의 아들’로 사셨던 방식인 것입니다. 이후에 3년간의 공생활이 이어졌고, 예수님은 그 기간을 군중 속에서 보냈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저분이 누구냐?”,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마태 13,56) 하고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었고, 평범한 사람들과 생활했던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 (마르 6,3) 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분이 하느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인류를 구원하셨고 모든 것을 당신께 이끄셨던 것입니다.

성탄이 가까워올 때마다 저는 아기 예수님의 상징물들을 즐겨 봅니다. 스스로 낮아지신 하느님을 나타내는 조각상과 그림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줍니다. 전지전능하신 그분께서는 우리가 알기 원하십니다. 당신이 완전히 무방비 상태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부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희생의 삶, 일을 하고 기쁨을 누리는 삶을 온전히 살아내도록 재촉하십니다.

우리가 실제로 예수님을 본받으려 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처럼 우리도 겸손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하느님의 위대하심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아십니까? 바로 구유 안입니다. 포대기 안입니다. 마구간 안입니다. 우리들이 구원사업의 협력자가 되도록 하는 힘은 오직 겸손을 통해서만 발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은 그만하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실감해야 합니다.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일지라도 개인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때때로 생기는데, 실제로 심각한 걱정을 낳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라는 것들은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스스로 오만해지고, 모든 이들의 중심에서 관심받고 싶어하며 자신을 좋아해주기를 바라는 욕망이 솟아나는데, 그런 사람들에게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항상 좋은 모습으로 보이길 원하고, 개인적으로 번듯하게 잘 되기를 바랍니다. 남몰래 실천하는 선행에 만족하지 못하다 보니, 영혼의 놀라운 평화와 엄청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만과 억측에 빠져 불행해지고 허망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겸손하셨습니다. 당신의 삶을 통틀어 그분은 어떤 배려나 특권을 좇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이신 그분은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성모님의 태중에서 9개월을 보내시는 것으로 지상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의 자연스러운 탄생과정을 따르신 것입니다. 그분은 인류가 당신을 간절하게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고, 모든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오시기를 갈망하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기다리셨습니다. 다른 모든 아기들이 태어나는 것과 같은 과정을 거쳐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잉태에서 탄생에 이르기까지 성모님과 요셉 성인 그리고 엘리사벳 성인을 제외하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 경이로운 진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사시기 위해 오셨다는 놀라운 진실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참으로 소박하셨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위풍당당하게 세상에 오시지 않았고 아무도 그분에 대해 몰랐습니다. 지상에서는 오직 성모 마리아와 요셉만이 이 거룩한 사건에 함께했을 뿐입니다. 나중에 천사의 메시지를 들은 목동들이 왔고, 동방박사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하늘과 땅을, 하느님과 인간을 하나로 이어준 이 초자연적 사건의 유일한 증인들이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에 무감해질 만큼 우리의 가슴이 무딜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낮추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당신이 베푼 사랑에 우리가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권능뿐만 아니라 그분의 놀라운 겸손 앞에서 우리의 자유가 머리 숙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느님이신 이 아기의 위대함이란…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분의 아버지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느님이신데, 정작 하느님의 아들은 “여관에 들어갈 자리에 없어서…” (루카 2,7) 구유에 누워계십니다. 모든 피조물의 주님께서 계실 곳이 어디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해 피어오르는 유향을 봉헌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 를 풍기는 고귀한 삶을 살고 싶은 우리의 소망을 봉헌한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그리스도의 향기로 충만하다면 이해와 친교의 씨앗을 뿌릴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배제되거나 버려졌다고 느끼지 않도록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애정이 넘치고 인간적인 온기로 가득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인류는 수 세기 동안 구세주를 기다렸습니다. 예언자들이 수많은 방법으로 그분이 오심을 선포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먼 구석진 곳일지라도 하느님을 향한 열망은 생생했습니다. 죄와 무지 때문에 인간에게 주신 하느님의 계시 중 상당 부분이 사라진 곳이라 하더라도 주님을 그리는 갈망은 살아 있었습니다.

때가 찼을 때, 구원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나타난 것은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 같은 천재적 철학자들이 아닙니다. 알렉산더 대왕처럼 이 세상을 모두 가진 강력한 정복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한 아기가 그 일을 했습니다. 그 아기가 바로 세상을 구원하실 분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말씀하시기 전에 행동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분이 가져오신 것은 마술 같은 비법이 아닙니다. 그분이 주시는 구원은 인간의 가슴 깊이 스며들어야 함을 당신께서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처음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그분은 자신이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낳은 아기와 똑같이 무방비 상태로 웃고 울고 잠을 잤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수 있고, 우리의 품에 그분을 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행동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는 물론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실패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을 단지 인간이 아닌 숫자처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밟고 올라설 발판으로도 여길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장황한 말을 들어주거나 여러분이 모욕을 줄 수 있는 군중으로 생각할 수 없으며 상황에 따라 마음대로 칭찬받거나 무시당할 수 있는 무리로 여길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무엇보다 먼저 여러분의 곁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십시오.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경이로운 이름에 걸맞는 완벽한 존엄성을 가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하느님의 아들과 딸들에게 우리 역시 하느님의 자녀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헌신적인 사랑이어야 하며, 매일 실천에 옮겨져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숨은 희생, 눈에 띄지 않는 자기증여와 같은 수많은 섬세한 행동들로 이뤄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우리의 첫 신앙공동체를 살았던 형제들로 하여금 ‘보라 그들이 어떻게 사랑하는지!’ 라고 외치게 했던 바로 그 향기인 것입니다.

이런 이상(理想)은 결코 실현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쾌활한 타르타랭’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소설 속 인물인 타르타랭은 자기 집 복도에서 사자를 잡겠다고 용을 쓰지만 당연히 사자를 찾을 수 없었던 허풍선이입니다. 저는 항상 실제적인 일상의 삶에 관해 얘기합니다. 노동의 성화(聖化), 가족 간 유대의 성화, 교우관계의 성화 등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런 일상의 생활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입니까? 기분 좋은 향(香) 냄새는 불타는 숯 위에 올려진 향의 보이지 않은 작은 알갱이들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 속에서 알아차릴 수 있는 “그리스도의 향기”도 마찬가집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갑작스럽게 타오르는 불꽃이 아니라, 꺼지지 않고 오래 가는 숯불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의, 충직, 성실, 이해, 관용, 기쁨과 같은 여러 미덕으로 타오르며 꺼지지 않는 숯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