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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예수 그리스도 → 그리스도왕 항이 있음.

교회 전례력 상의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제대(祭臺)의 거룩한 희생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께 드리는 희생 제물을 새롭게 봉헌합니다. 우리가 곧 감사송에서 함께 노래하겠지만, 정의와 사랑,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성스로운 인간애를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의 영혼 깊이 엄청난 기쁨을 실감합니다. 그분은 여러분처럼 인간의 마음을 가지신 왕입니다. 그분은 온 우주와 모든 피조물을 지으신 분이지만, 결코 전제 군주처럼 우리 위에 군림하시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당신의 상처를 우리에게 말없이 내보이며 작은 사랑을 당신께 달라고 하실 뿐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알지 못할까요? 왜 우리는 여전히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루카 19,14)라는 잔인한 거부의 목소리를 듣는 걸까요? 이런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거부하는지조차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분 얼굴의 아름다움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얼마나 놀라운지 깨닫지 못합니다. 이런 슬프고 안타까운 상황 때문에 저는 주님께 속죄하고 싶습니다. 말보다 비열한 행동으로 표현되는 끊임없는 아우성들을 들을 때면 저는 이렇게 외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행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온갖 방법으로 그분을 반대합니다. 자신들이 처한 환경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인간 사회에 대한 접근 방식을 통해, 도덕과 과학과 예술을 통해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말로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악당들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자신의 행동으로 그분을 모독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 왕’이란 표현만으로도 기분이 상하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 왕직’이 정치적 용어로 생각될 수도 있다는 듯이 그 말에 대해서 고지식하게 반대합니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왕이라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길 거부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의 계율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계율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경이로운 사랑(愛德)의 계명조차도 말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가까이 다가가길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야망은 스스로의 이기심을 섬기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주님께서는 제게 “저는 섬길 것입니다”라고 말없이 반복해서 외치도록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이 굳세지도록 해달라고 주님께 부탁드립시다. 매일매일의 일상생활에서 소란 떨지 말고 천진한 마음으로 당신의 부르심에 항상 충실하게 해달라고 간청합시다. 그리고 우리 마음 깊이 그분께 감사드립시다. 우리는 당신 사랑의 대상이자 당신의 자녀로서 그분께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의 입은 젖과 꿀로 넘쳐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해 얘기하며 참으로 큰 기쁨을 찾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자유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쟁취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주님 

우리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베들레헴에서 목격했습니다. 바로 그 사랑스러운 아기가 온 우주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함께 이 사실을 묵상합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그분께서 지으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들이 아버지 하느님과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이 흘린 성혈로 하늘과 땅 사이의 평화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계신 임금이십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뒤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말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사도 1,11)

비록 인간의 정치 권력을 가진 임금들은 오래 가지 못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통치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십니다” (탈출 15,18), “그분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이고 그분의 나라는 대대로 이어지리라.” (요한 4,31)

그리스도의 나라는 단순한 비유적 표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사람이 되셨을 때 취하셨던 똑같은 육신으로 살아계십니다. 또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을 때의 그 영광스러운 육신 또한 말씀이 사람이 되신 모습 그대로 계속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진정한 하느님이시고 또한 진정한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살아계시고 다스리십니다. 그리스도는 우주의 주님이십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그 존재를 유지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분은 가장 영광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지 않나요? 왜냐하면 당신의 나라는 비록 이 세상에 있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기” (요한 18,36)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요한 18,37) 메시아에게 눈에 보이는 찰나의 권능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잘못 판단했던 것이지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로마 14,17)

하느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진리와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 있는 곳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이는 곧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활동이자, 인간의 역사가 끝나고 마지막 날에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오실 때 절정에 이를 하느님의 역사(役事)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가르침을 주기 시작하셨을 때 정치적 계획(政綱)을 내세우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태 3,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기쁜 소식을 널리 알리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곧 오실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 그리고 그분의 정의는 곧 거룩한 삶이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필요한 유일한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초대입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마태 22,2-3) 그러므로 주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라는 진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누구든 자유롭게 그리스도 사랑의 요청에 응답한다면 그 누구도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사랑의 요청이란, 다시 태어나는 것 , 영적으로 단순해져서 어린 아이처럼 되는 것 ,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으려는 모든 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뿐 아니라 행동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결연히 노력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분투하는 자만이 영원한 유산을 받을 자격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지상에서 완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구원이나 심판의 최종 판결은 이곳 지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씨 뿌리는 것과 같고 , 겨자씨가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에 그것은 물고기로 가득 찬 그물과 같을 것입니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처럼 모래 위에 던져져서 의로운 삶을 산 이들과 사악한 삶을 산 이들로 가려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 지상에서 사는 한, 하늘나라는 어떤 여인이 밀가루 서 말 속에 넣었다가 온통 부풀어 올라 버린 누룩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일러주신 나라를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나라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상인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얻어야 할 진주인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참으로 밭에 숨겨진 보물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하늘나라는 얻기 어렵습니다. 그 나라를 얻을 수 있다고 아무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인간의 겸손한 울부짖음은 하늘나라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도둑들 중 한 명이 주님께 간청했습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42-43)

우리 영혼을 다스리시는 주님 

우리 주님, 우리 하느님은 얼마나 위대하신지요! 우리 삶에 초자연적인 의미와 거룩한 생명력을 주시는 분은 바로 당신이십니다. 당신 아드님의 사랑을 이루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존재, 영육 간의 모든 것을 걸고 우리가 이렇게 말하도록 하십니다. “그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참으로 나약한 우리들이지만, 우리는 “그분께서 다스리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당신께서는 우리가 진흙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피조물들입니다. 우리는 발에 묻은 진흙에 지나지 않지만, 마음과 머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당신을 통해서만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선,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혼을 다스리셔야 합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내가 네 안에서 다스리기 위해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하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저는 당신의 은총이 절실하다고 답하겠습니다. 오직 당신의 은총이 있어야만 제 모든 심장 박동과 호흡, 그리고 최소한의 진지한 시선과 가장 평범한 제 언어들과 기본적인 제 감정이 저의 임금이신 그리스도께 드리는 찬미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임금으로 모시고자 노력한다면, 우리들 자신이 한결같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우리 마음을 드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공허한 노릇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행동에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요소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존재하지도 않는 신앙을 겉치레로만 보여주게 될 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인간의 이익을 위해 잘못 쓰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저나 여러분이 완벽해야만 예수님께서 우리 영혼을 다스리신다면, 우리는 정말로 절망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딸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오신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요한 12,15) 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시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비천한 동물을 왕좌(王座)로 쓰십니다. 여러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리스도의 눈에 제가 한 마리의 당나귀로, 짐승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저는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 앞에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그러자 저는 늘 당신과 함께 있어 당신께서 제 오른손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시편 73,22-23) 예수님 당신께서 제 고삐를 쥐셨습니다.

당나귀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그 짐승의 모습을 한 번 떠올려보십시오. 난데없이 발길질을 해대는 늙고 고집스럽고 고약한 당나귀 말고, 귀가 안테나처럼 쫑긋한 어린 당나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녀석은 많이 먹지 않고 힘들게 일하며 잽싸고 경쾌하게 걷습니다. 더 말쑥하고 날래고 힘센 동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군중의 환호에 답하시며 임금으로서 백성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분이 택하신 동물은 당나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활한 사람들과 냉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겉으로는 매력적이지만 공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십니다. 그분이 좋아하시는 것은 젊은 마음, 소박한 발걸음,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지니는 활달함, 그리고 당신의 애정 어린 충고에 주목하는 맑은 눈동자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을 다스리시는 방법입니다.